본문 바로가기
오피니언/에셀라 시론

[에셀라 시론] 소녀의 이름으로

자유의새노래 2026. 3. 19. 00:00

 

나는 이제껏 김용철의 새능력을 왜 더 빨리 탈퇴하지 못했는가에 대한 괴로움에 사로잡혀 있었다. 좀 더 빨리 탈교(脫敎) 했다면, 조금 더 빨리 관계를 정리했더라면…. 소년을 구하지 못한 죄책감은 우연히 입수한 18년 전, 한 영상을 보면서 오롯이 해소되었다. 연세중앙교회 YBS 인터뷰에 담긴 소년은 짐짓 말할 수 없는 모든 죄를 짊어진 표정으로 이렇게 말한다. “내가 알고 지은 죄인데 왜 그걸 지금까지 해결하지 못했는가….” 도대체 중학교 2학년이 무슨 죄를 지었기에 카메라 앞에 서서 자책하며 스스로를 옥죈단 말인가. 

새능력을 탈퇴하고서 나는 단 한 번도 김용철의 설교를 끝까지 들어본 일이 없다. 양심에 찔려서도 아니고 눈물이 감격으로 앞을 가렸기 때문도 아니다. 1시간 설교 모든 문장 옭아맨 감정 동원과 협박 구조, 의미 없는 아멘의 반복, 철학도 신학도 없는 감정만 휘젓는 수준의 처참한 호통은 그의 설교를 들어보면 누구나 깨닫게 된다. 그는 오로지 의식의 흐름에 의지한 채 청중을 감정적으로 끌고 다닐 뿐이다. 각 단락 사이의 논리적 연결은 찾아볼 수 없다. 자기도취에 빠진 간증을 서사로 가져다가 어떻게든 이어 붙이는 게 전부다.

모든 것 공허함의 파도밖에 보이지 않던 시절, 나는 죽을 용기를 가지고 어둠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 시절 스물 두 살의 나는 미지(未知)의 두려움을 견뎌야 했다. 이제는 지옥에 가는 건가 싶었다. 가족도, 연고도 없이 새능력에 붙잡혀 노동 착취를 당했어도 불안함은 가시지 않았다. 그로부터 10년이 흘렀다. 그동안 탈출이 재생되었다. 때로는 방송실 귀퉁이에서 일을 하는 장면이 꿈으로 재생되었고, 어쩔 땐 빠져 나오는 꿈을 꾸기도 했다. 많으면 한 달, 뜸하면 서너 달에 한 번 연속된 꿈은 새능력으로부터의 완전한 탈출을 가리키고 있었다. 과거의 나로부터 찾아오는 ‘시간의 죄책감’이 나를 오랜 시간 사로잡은 것이다. 몸은 난파선을 벗어났지만 아직도 나의 혼은 그곳에 갇혀 있었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허물어지는 시간. 탈교는 무너진 영혼 속에서 재가 되는 순간이었다. 그저 어른들이 주입한 죄책감은 남은 인생의 각도를 비틀었다. 어그러진 관념과 여성성에 대한 왜곡된 이해는 긴 시간의 교정이 아니었으면 영구히 손상되었을 것이다. 바로 그 소년이 자신의 입으로 토설한 ‘알고 지은 죄’는 이브가 선악을 알게 하는 실과를 따먹은 상징이다. 왜곡된 여성 이해의 뿌리는 기독 담론 그 자체다. ‘성숙한 소녀’라는 어른들의 거짓말이 빚어 만든 망상이 소녀의 노동을 착취했고, 소년의 미래를 짓밟은 것이다.


소년을 옥죄던 근원
새능력의 노동 착취
그 아둔했던 시간들
아직 끝나지 않았어
다시 일어서 보자고
오늘도 기록할 테니
가장 나약한 당신의
그 숭고한 이름으로


탈교 이후 나는 차근차근 기독 담론을 해체하기 시작했고 비로소 소녀를 다시 발견하게 되었다. 그 소녀는 누구인지, 무엇을 하는지,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천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선악과를 먹은 후 야훼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침잠한 것처럼 나는 소녀 앞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되어가는 과정을 순연(純然)하게 바라보듯 과거의 시간을 다시 배열하고 재건하는 소녀의 손길을 말없이 볼 뿐이었다. 소녀는 잃었던 재주, 놓쳤던 이름, 잊혔던 얼굴을 되찾았다. 에덴의 난민, 아담과 이브는 재건의 기회조차 잃었으나 소녀는 신의 질서를 거스르고 마침내 ‘지금 여기(hic et nunc)’의 자리에 섰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소녀의 일하는 광경 속에서 기록하는 것뿐이었다.

‘기억의 화해’가 시대 담론으로 등장하면서 나는 더 이상 기독교의 언어로는 표현하지 못할 또 다른 층위를 발견했다. 신의 표정으로도 완곡하게나마 이해하지 못할 ‘틈’ 말이다. 선과 악, 기존의 이분법으로는 도무지 깨달을 수 없는 세계의 공감각(共感覺)은 소녀를 통해 이해됐다. 인간은 죄인도 선인도 아닌, 헛발질 속에서 삶을 살아가는 존재일 뿐이었다. 소년에 대한 집착에 가까운 죄책감은 소녀가 조금씩 덜어내기 시작했다. 과거의 모든 순간들, 새능력에서 착취당한 노동의 현장까지도 버릴 것 없는 시간이었음을 소녀는 가리켰다. ‘소녀소년담론’은 세계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야를 자극했다. 소녀는 그 빗장을 열었을 뿐이다.

만일 10년 전 새능력에서 벗어날 죽음의 용기가 없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난파선의 현실을 외면하고 적당히 구원 받은 죄인 정도로 살았더라면 어떻게 비뚤어졌을까. 무한한 죄책감으로 자기 파괴적인 교리를 끌어안고 살았더라면 얼마나 오래 망가졌을까. 지금도 새능력은 이 소녀의 역사(役事)를 알지 못한다. 그저 세속의 논리로 외면할 뿐이다. 가장 나약한 예수를 통해 세상의 죄에서 인류를 구하던 담대한 교리는 가장 힘없고 처연(悽然)한 소녀를 짓밟는 도구쯤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 어른들은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다. 망가진 인생은 순종하지 않은 개인의 문제, 개인의 책임쯤으로 덮어두고 못 본 체 할뿐이다.

그러나 나는 새능력을 벗어난 지금까지의 10년을 거꾸로 보기로 다짐했다. 소년 시절부터 망가진 인생이 아니라 신의 세계에서 벗어나려는 인간의 강렬한 헛발질로. 새능력으로부터 멀어지는 아둔한 세월이 아니라 난파선을 등진 채 살아온 작별하지 않은 시간으로. ‘틈’ 속에서 발견하는 끝없는 물음과 알고 난 후 선택하는 생생한 오늘의 윤리적 책임으로. 원고와 마감 악다구니에 못 이겨 작은 문장조차 기어이 다시 쓰게 만드는 그래서 매력적인 너, 소녀의 이름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