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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건조한 기억모음③] [2] “담임목사는 참 욕심이 많다 그려”

자유의새노래 2022. 7. 14. 07:02

 

교회는 키우고 싶고, 일할 교인은 몇 없고

 

흔한 좋소기업과 다르잖은
주먹구구식 경영 방식에는
400만원 월급쟁이 목사의
‘큰 교회’ 욕망에서 싹튼다

 

그날 해가 져도 ‘한 장만 더 붙이자’는 마음으로 홍제동 거리를 누볐다. 좁은 골목, 가로등 불빛조차 닿지 않는 곳에서 혹시나 전단지를 떼어내는 건 아닐는지 조마조마했다. 창립기념일을 준비하며 교회에 헌신할 수 있음이 감사했다.

담임목사는 주일예배 때마다 기도했다. “고사리 손으로 드려지는 주일학교 헌금도 받아주시고…….” 작은 자 한 사람도 교회를 위해 일한다면 하나님은 작은 자라도 기억해주실 것이란 믿음을 가졌다. 따라서 배고프고 목이 말라도 칠흑 같은 어둠 뚫고서 앞으로 내 모교가 될 제일고 길목을 지나쳐 관동중 후문으로 걸어갔다.

목사는 교인의 믿음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헌신을 생각하는 목사의 인식도 아둔하기 짝이 없었다. 당연히 은혜를 받은 만큼 교회에 충성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문제는 이 교회가 작은 교회란 점이다. 교인들 모아봐야 300명도 되지 않으며 2014년 기준 한해 헌금액은 2억에 불과했다. 목사는 설교를 통해 당당히 말했다. “그래도 강릉에서 이 정도 교인수면 곱하기 두 배는 쳐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주먹구구 방식의 경영은 중학교 2학년 소년에게 교회 방송실을 맡기기에 이르렀다. 방송실뿐만 일까. 회계부터 식당까지 교회 곳곳 교인들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주일학교는 대학생 누나들을 교사로 삼았고, 피아노 반주는 중학교 여학생에게, 교회 집사와 성도들은 한복으로 갈아입어 주보를 나눠주었다. 남자 교인이라 해서 일이 없던 건 아니다. 차량운행과 행사 때마다 필요한 장비 이동에 교회가 헌신으로 인력을 부렸다. 게다가 토요일은 전교인 대상으로 시내 전도활동도 이어갔다.

거기에다 주일예배, 수요, 금요철야, 학생, 새벽예배에 십일조까지 강조했다. 상식적으로 이런 교회에 헌신할 젊은이는 아무도 없다. 많아봐야 다섯 명 유동인구의 청년들도 대학생활을 병행했을 뿐, 직장생활 병행하던 젊은이는 한두 명에 그쳤다. 뭣 모르고 교회에 코 꿰어 신앙을 이유로 헌신한 사람이 나뿐만이 아니었다. 언젠가 소개할 ‘그 누나’는 평일엔 대학생활, 주말엔 교회생활에 온몸으로 투신했다. 밤 10시 넘은 토요일 저녁까지 교회 사무실에 남아 퀭한 얼굴로 묵묵히 일할 뿐이었다. 그때 누나의 한숨이 가슴을 할퀸다.

 

10년 전 대개 교회들은 반주자 구하는 일이 어렵지 않았다. 허나 참여교회는 반주자 한 명 구하기가 힘들었다. 오죽 일하는 게 힘들었으면 싶다.


성경 어디에도 교회 일에 충성하라는 구절은 없다. 예수는 자신을 위해 분주히 일하던 마르다에게 말했다. “주님의 일은 많지 않거나 하나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누가10,42) 분명히 예수는 분주하게 일하던 마르다보다 자신의 가르침을 듣던 마리아의 행동을 긍정했다. 교회는 교회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 노동과 봉사를 필요로 한다. 교인들의 헌신과 봉사 그 자체가 잘못된 일은 아니다. 예수는 예수 자신에게 대접하던 마르다의 마음까지 문제 삼지 않았다.

그러나 참여교회 담임목사는 교인의 순진한 헌신을 이용했다. 결코 과한 노동에 “그만하라”는 말을 하지 않은 것이다. 나에게 만큼은 한 차례 “방송일이 힘들면 언제든지 그만두어도 좋다”고 말했다. 힘들어서 방송 일을 그만둔 이후, 교회 보직은 단순히 방송 업무를 없애는 데서 그쳤다. 주일학교 교사 보직 등 다른 보직 이동은 없었다. 문자 그대로 방송 업무라는 짐을 없앴을 뿐이다. 업무분장도 이럴진대 방송실 자체를 개편했느냐, 그렇지도 않다. 여전히 누군가는 맡아야 할 일로 남은 채 다른 교인으로 채우는 방식으로 시스템을 유지했다.

누군가가 알아주지도 않는다. 누군가가 알아주는 게 중요하냐고 물을지 모른다. 신앙의 인지부조화는 허탈감에서 비롯한다. 교회에 열심히 충성했지만 항상 좋은 결과가 기다리지 않는다. 실패의 원인을 교회와 신앙에 최선을 다하지 않으므로 보는 교인이라면 더욱 느낀다. 교회 봉사라는 행동 속에 기복(祈福)과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욕망이 숨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누군가가 알아주는 건 중요하다. 알아주는 그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누군가 알아주길 바라는 내 욕망을 보기 위해서라도, 누군가 알아주는 게 중요하다.

한국 개신교회가 이익집단으로 전락하는 사이. 교인들의 헌신과 노고는 고작 교회라는 이익집단에 충성한 광신도 이미지로 굳어갔다. 사회는 이 노고를 우습게 생각한다. 교회는 순진한 사람을 이용해 자기 이익에 충실한다. 교회를 나오면 누구도 책임져주지 않는다. 당신의 그 헌신이 천국에서는 해같이 빛나기는커녕 이 세상에서 목사의 그 400만원 월급*만 든든해질 뿐이다.

그러므로 교회에 충성할 필요가 없다. 하느님도, 예수도 그런 충성을 바란 적이 없다.

“내가 바라는 것은 변함없는 사랑이지, 제사가 아니다. 불살라 바치는 제사보다는 너희가 나 하나님을 알기를 더 바란다.”(호세6,6)

*목사가 설교 중 실제로 한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