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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건조한 기억모음③] [1] 저녁해가 뉘여서도 2학년 중학생은 전단지 나르며, 좋은교회 홍보했다

 

매년 4월 2일은 교회 창립일이다. 참여교회는 창립기념일이면 여느 교회 못지않게 갖은 행사를 개최한다. 뷔페를 예약해 배터지게 먹은 해도 있었고 큰 규모 식당을 운영하던 집사의 사업체에 힙 입어 식후(式後)를 잇기도 했다. 발레단 선율의 무대, 이름 모를 목사가 기타 치며 노래 부르는 행사 광경은 낯익다. 언젠가는 가스펠 매직(Gospel magic) 마술사 이현 전도사를 초청했다. 플랜카드엔 띄어쓰기 없이 ‘이현전도사’로 돼있기에 주일학교 학생과 “저거 ‘이현 전도사’가 아니라 ‘이현전 도사’님 아니냐”고 농담 건네곤 했다.

8주년은 유별났다. 231제곱미터, 그러니까 70평 지하에 세 들던 교회가 무슨 돈으로 시 아트센터 900석 홀을 대관했는지 모르겠다. 북한 이탈주민이 모여 결성한 ‘평양민족예술단’까지 초청했던 2008년은 역사상 가장 큰 행사를 개최한 해였다. 그땐 방송실 개념도 없어서 음향은 외주 받았고 중년 집사가 프리젠테이션(pptx)으로 방송 업무를 진행한 해였다. 중학생 2학년일 내게 맡긴 일은 없었지만 후술할 기억하는 한 가지. 교회는 각 부서별로 제각기 창립기념일 준비로 분주했다. 창립기념일이 지나 목회자주일이던 5월 마지막 주. 주일학교 교사인 내게 방송실 업무가 주어졌다. 교회는 조금씩 교인들에게 고유 업무를 배정하는 방식으로 꿈틀거렸다. 중학생이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갓 중학생이 주일학교 교사되기까지
마지막 겨울방학 끝으로 졸업 딱지 뗀 건 초등학교만이 아니었다. 교회도 주일학교를 운영했고 고학년 배지와도 작별했다. 5000원 문화상품권과 꽃 한 송이, 개역개정 성경을 선물로 받았다. 처음 내 소유의 성경책을 받고서 이상한 기분에 좋으면서도 낯선 감정을 느꼈다. 이상한 기분에는 책임감이 자리했다. 이제 마음대로 어른들만의 11시 예배에 참석할 수 없게 되었다. 11시 예배와 토요일 청년학생 예배에 의무라는 딱지가 붙은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담임목사는 설교를 못했다. 얼마나 못했느냐 하면, 중학교 1학년이 들어도 무슨 내용인지 모를 만큼 따분한 수준이다. 논리 정연하지 않았다. 이 말 저 말 섞어가며 열변을 토하는 게 그때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았다. 11시 예배 또 다른 이름이 ‘어른예배’인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초반엔 청년학생 예배에도 불참했다. 담임목사가 설교했기 때문이다. 뭐 하러 재미없는 노래나 부르고 의미 없는 설교나 듣기 위해 아까운 토요일 오후를 낭비해야 하는지. 목사는 예배 불참에 대단히 서운해 했고 부담스럽게 참석을 요구했다.

주일학교를 졸업하자 바로 주어진 업무는 주일학교 보조교사 역할이다. 오랜 시간 고학년 위치에 서다보니 저절로 주어진 셈이다. 당시 교회에는 지속적으로 가르칠 교사가 없었다. 한두 달 하다가 그만두기 일쑤였다. 집사 직분의 교인들이 거들었다. 그땐 공과로 가르치지 않았으므로 같이 노는 게 전부였다. 중학교 3학년이 되고서야 본격적인 반 배정이 이루어졌다. 담당 학년은 5학년. 학생만 두 사람. 한 여자 아이는 지금까지도 교회 다니지 않지만 다른 남자 아이는 현재 교육 전도사가 되었다.

 

 

공과(敎會學校 敎材)
교회학교에서 가르치는 교재를 의미하며 어원은 알려진 바 없다. 영세한 교회는 교단에서 제작한 일년 단위 교재를 교사들에게 나눠준다. 이 과정에서 교사용 교재를 통해 교육한 후 현장에 투입한다.

 

◇내내 울면서 예배를 드리던 먹먹한 마음
아이들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 그 아이는 덩치가 컸다. 예배 후 몸으로 게임하던 시간, 남들보다 빠른 손으로 카드를 뒤집자 서운함을 못 이기자 내게 충돌하며 분풀이 했다. 놀란 나머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주위 교사 집사들이 중재하고 말았다. 내가 담당하던 아이가 자기감정을 마구 풀어내는 모습에 나약한 내 모습을 보았다. 이럴 땐 어떻게 달래야 할지 알지 못했다. 그 아이는 토라져놓곤 뒤돌아보지 않았다.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복구하기 어려운 절망스러움이 괴롭게 만들었다.

무거운 마음으로 11시 예배에 몸을 실었다. 훗날 찬양 인도하던 꽁지머리 집사님이 방송용 카메라를 구했다며 찬양 부르던 중간 중간 돌아다니면서 이모저모를 촬영했다.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저 가련한 아이의 마음을 어떻게 돌봐야 할지가 우선인 탓이다. 시간이 흘러 집사님은 녹화 영상을 다시 보는 과정에서 그날 왜 울었는지를 물었다. 멋쩍은 미소로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아이 할머니는 지역에서 이름 난 불교 신도였는데 손자 녀석 교통사고 난 후 신앙의 힘으로 극복하자 개종했다. 다른 교인과 갈등을 빚은 끝에 교회를 떠났고, 더는 그 아이와 만나지 못했다.

중학생 시절만 해도 신앙은 분명했다. 이 교회가 아니면 안 된다는 믿음. 그 나이 때 경험한 어른들의 일탈과 다툼을 지켜보며 마음으론 ‘저렇게 살지 말아야겠구나’ 다짐했다. 따라서 어떤 갈등이 벌어져도 이 교회를 벗어나지 않을 단단함이 남았다. 문상만 받고 그만 다니는 아이들과 생각이 달랐다. 내게 주어진 일이 있다면 끝까지 책임져야 했고 잘 해내야 한다는 순진함을 심어준 이는 누구였을까. 우울증이 심화되어 간헐적으로 교회를 나가기 전까진, 한 번도 주일예배를 결석하지 않았다. 이 정직함과 성실함은 어디에서 배운 걸까.

 

 

중학교 올라가자마자 교사로
주일학교 졸업하고 주어진
첫 근무는 ‘보조교사’ 역할
고학년에서 그대로 교사직
이어지자 9년간 직무 맡아


초등생 시절과 달라진 환경
①관심사 공유할 이 없어
②평범한 욕망, 죄악으로
③성찰과 성장 없는 신앙
이 모든 게 우울증 만들어


그래서 남은 질문
신앙과 삶에서 불일치 일자
교회와 심리적으로 멀어져
그래도 교회를 다니던 이유
“착하고 성실한 삶 위해서”

 


◇중학생이 되고서 사라진 정겨운 풍경들
생각해보면 초등생 시절 교회 다닌 궁극적 이유는 교회 친구와 동생들 때문이다. 교회에는 같이 메이플스토리 할 친구가 있었다. 레고를 지으면 박수쳐줄 누군가가 있었고 코믹메이플스토리 캐릭터를 그리면 감탄해줄 여자애가 있었다. 관동중 후문 편의점으로 걸어가는 10분 남짓한 시간 어이없는 농담 주고받으며 우애를 다져간 시간은 중학교로 올라가면서 자연스레 사라졌다.

친한 관계가 사라진 건 당연했다. 여느 고등학교 형, 누나와 달리 아이돌에는 관심이 없었고 뮤직뱅크조차 보지 않았다. 예능 볼 시간에 그림을 그렸고 나만의 세계를 창조해 나갔다. 그마저도 목사는 자기 개똥철학으로 설교하기 바빴기에 퍼피레드 버뮤다 순복음교회에서 신앙활동을 이어간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자기를 들여다보는 성찰의 시간도 없었다. 그저 예배 불참한 행동을 회개하는 반복 기도만 가르치던 시절이다. 인간은 왜 죄인인지를 묻기 위해 자발적으로 만든 온라인 버뮤다 순복음교회에 많은 시간 할애했다.

그러나 경건한 삶은 이어지지 못했다. 성욕 때문에 힘들었다. 지금이야 커뮤니티 일대에 늘여놓은 자기 경험담을 참고해 더듬어 알아 가면 되지만, 그때는 아무 정보도 없었다. 철없는 남학생 음탕한 농담과 저 애가 남자 선배와 한다던 끈적이는 소문만이 전부였다. 사춘기 시절, 경건하게 살아야 한다는 신앙적 욕망과 그래도 여자의 몸이 끌리는 육체의 욕망은 이중적인 삶을 낳았다. 죄를 지으면 지을수록 죄책감은 더해갔고 자존감도 떨어졌다. 그럴수록 사람들과 멀어졌고 가면으로 꽁꽁 싸매었다. 보기에는 착한 학생일진 몰라도 마음만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나쁜 학생은 아니었다. 담배를 피우지도 않았고 술을 마신 것도 아니었다. 철없는 아이들을 따라가지도 않았다. 그저 내 안의 계명이 올무가 되었을 뿐이다. 신앙과 삶의 불일치는 차츰 참여교회와 심리적으로 멀어진 계기가 되었다. 일단 담임목사의 개똥철학 설교가 큰 몫 했다.

 

 

구성전/2000년 초반 담임목사로 부임하며 지하에서 세 들던 교회는 2010년 기존의 교회 건물을 매입하는 방식으로 3억 빚을 지고 이사했다. 231㎡(70평)에서 연면적 1000㎡(300평)로 이사해 시내 교회들 중에 이름을 알렸다. 이 과정은 오로지 교인들의 헌신으로 밖에는 설명하지 못한다.

 


◇정직하고 성실해서, 그래서 절망적인
공식적으로 우울증 진단을 받은 시기는 고등학교 1학년을 마친 겨울방학이다. 어느 날 갑자기 우울증이 발병해서 병원에 가지 않았다. 점차 우울증이 심해져간 시기만 2-3년이었으니, 중학교 올라오고부터 증상이 시작된 셈이다. 사춘기 영향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몸은 욕망을 추구하지만 생각은 경건을 요구했다. 따라서 담임목사는 사춘기 자체를 부정했다. “내 때는 사춘기도 없었다”는 말을 백번 양보해 적용해도 내 우울증 발병은 참여교회의 이중적 신앙이 일으킨 것이다.

교회의 엄격한 규율과 예배, 그리고 교회 중심 생활의 강조. 그러나 중학생이기에 경험하는 충동. 주일학교와 결이 다른 어색한 분위기. 자기 인생철학을 복음이라며 설교해댄 철없는 목사. 이 모든 환경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했으므로 인지부조화를 일으켰다. 그럼 그런 교회를 왜 다녔느냐고 물을지 모른다. 질문에는 늘 이렇게 대답한다.

“다녀야 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천국은 가야했지만 꼭 천국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생에서도 착하고 성실한 삶을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교회가 필요했다. 단 한 번도 교회 없는 삶을 생각해본 적 없는, 마치 고대 이스라엘이 신 없는 세계를 상상하지 못했던 것처럼 성실함이 시너지 효과를 일으켜 우울증이라는 거대한 괴물을 만들어 생채기를 내었다. 유감이다.

8주년 행사는 이제껏 개최한 교회 행사 중 가장 규모가 컸다. 내게 주어진 업무는 한 가지. 전단지 유포. 토요일 학생예배 마치자 한 사람, 한 사람 전단지 건네주는 교회의 손길을 뿌리치지 못해 시내로 나갔다. 홍제동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좋은교회, 우리 교회 좀 와달라고 전단지를 뿌렸다. 당연히 무급으로 일했다. 시간이 흘러 창립 20주년 기념 영상에서 담임목사가 말했다.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로 점점점점 더 성장해 갈 수 있었다…… (중략) 2008년 가을 쯤 되었을 때 2009년도에 하나님이 새로운 성전을 주실 것에 대한 마음을 하나님이 주었다.”

남들 대충 떼우고 들어오는 걸, 해가 떨어져도 골목길 샅샅이 돌아다니며 한 장 남김없이 우체통에 꽂아두었다. 그리고 돌아온 교회엔 “잘했다” “수고했다” 말 한 마디 건넨 어른과 친구들은 없었다. 중소기업에서 성실함은 착취의 대상일 뿐이다. 참여교회라고 다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