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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지애문학

[지애문학] 배제


아침부터 차장한테 깨져야 했다. 일러스트 그따구로 그릴 거면 때려치우라고. 언제부터 신문이 개인 연애편지 쪼가리였느냐고. 그딴 종이 쪼가리 윤전기에서 태어나자마자 외국에 버려지잖느냐 내뱉을 뻔 했다. 자유의새노래는 좀 이상한 신문이다. 한갓 변호사에 불과한 30대 남자를 견제하다 못해 악마를 변호하는 능력 있는 악당으로 몰아가질 않나 다소 괴랄하게 보이도록 그리라질 않나. 그러면서 논설위원은 밥도 먹는데. 적당히 거리를 두기는 두지만 뒤에서는 기회라도 생긴다면 단번에 칼 꼽을 만한 느낌적 느낌. 아직까진 여기만한 일자리도 없고 노동은 고 돼도 남는 건 있으니 버텨야 했다.

유독 김 변호사 일러스트만 샤프한 그림체에 며칠 전부턴 몰래 하트까지 새겨 넣었으니. 신문을 보아 온 예리한 독자가 진짜로 찾아낼 줄, 아니 그런 독자가 실제로 있는 줄 오늘 처음 알았다. 문제는 일러스트가 아니었다.

“너, 만나지 말라고는 안 한다. 단독으로 내보내는 정보들, 흘리지 마라. 진심으로 걱정하는 거다.”

자리에 돌아와 커뮤니티를 빠르게 스캔했다. 누가 봐도 내 그림, 샤프하게 생긴 김석진이 전시 돼 있었다. 딱 봐도 잘 그렸네. 괜히 잘 그려서 혼난 거야. 아래의 댓글을 읽으며 잠시 동안 마음이 냉랭했다. 생각해보면 그 남자가 나에게 잘 해주고, 차로도 바래다주고 밥 몇 끼 먹은 게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된 호의 같았다. 정말로 신문의 정보를 빼올 수 있어서 접근한 걸까. 괜히 일러스트 디자이너가 사랑에 빠지는 상상이 순진한 두근두근일까. 썸도 아니고, 아주 친한 것도 아니면서 애매모호한 관계가 몇 달 이상 이어지는 게 좀 이상했다. 그저 그 분 성향이려니 했는데 말이다.

한 기자가 “원탁회의!”하고 소리치자 취재 기자들이 모여 원으로 둘러싸기 시작했다.

“오늘 후임자가 발표한다던 인선 어떻게 됐어?”

“김석진 변호사라던데, 아직 확실치 않습니다. 공판 준비도 빠듯하고, 둘 중 하나를 포기해야 할 상황입니다.”

사무실 중앙에 사각형 책상을 둘러싸 내일 내보낼 신문이 놓여 있었고 빨간 펜을 들어 무언가를 쓰면서 지면회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멀리서 바라본 기자들은 김석진을 말하고 있었다.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집까지 바래다 준 그가 청와대 대변인실로 발탁 됐다는 정보였다. 조마조마했다. 김 변 일러스트에 하트 쳐 그린 새끼 누구냐고 소리 지를 것 같았지만, 일러스트 내용은 한 차례도 나오지 않았지만서도 그간 내가 알던 남자와는 멀다는 사실에 이질감을 느꼈다.

일정 시간 지난 다음 김석진 관련한 모든 인터뷰 취재 기사 엎으라는 지시가 그 건의 마지막 사항이었다. 배제. 그쪽 사람이 되었으니 나쁜 놈으로 몰아가던지, 없는 놈 취급한다던지. 어쨌거나 배제하겠다는 메시지임은 틀림없다. 당장에라도 물어보고 싶었다. 정말 청와대 들어가는 거 맞느냐고. 대답해주면 그에겐 나는 내 사람일 테고 반대라면 그저 흘러가는 소식통일 뿐이고. 일사분란하게 사라지는 기자들 사이 회의를 주재한 그 밥 먹었다던 논설위원이 안경을 벗고 뭐라 뭐라 씨 부린다.

“새 정부 출범한 지 고작 두 달 지났어. 자칭 개혁 정부답게 대변인도 벌써부터 갈아 치우려는 심보 참……. 일단 상단에 넣지는 말고 대체 기사 채웠다가 확실해지면 넣어. 그리고,”

그리고?

“그 일러스트 그린 사람 누구야? 주필 신경 쓰지 않게 그런 것 제대로 좀 해. 이래서 기자로 뽑아야지 내참.”

나 때문에 숙이는 부장, 차장이 죄송해졌다. 싱숭생숭. 그냥 사람 얼굴에 똥이나 그려서 낼까. 세상 똥 같은 게 차장도 똥 같고 신문도 똥 같다. 똥 닦을 때라도 안 쓰는 종이쪼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