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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지애문학

[지애문학] 잊어버려야 할 때

입력 : 2021. 02. 24  21:15 | 디지털판

 

D+1100. 지울까 말까 고민만 수백 번. 달달해서 짜증났다. 어제의 네 미소가 오늘의 쓰디쓴 망상으로 이어질 줄은 정말로 몰랐다. 가끔은 폭발하는 내가 너무 싫었다. 연례행사라도 하듯 한 달에 한 번쯤 예민해지는 시기가 미웠다. 그래서 어제는 이해해주는 줄로만 알았다. 착각이었다. 만나자 해도 확인 하나 없었고 연락을 해도 받지를 않는다. 고작 네 글자, 그 한 마디 꺼내려 잘해줬다고 생각하니 화가 치밀었다.

마지막 한 모금 마시고서 찌그러뜨리고 나서야 일어났다. 추웠다. 지애야, 패대기치고 나오는 순간만큼은 좀 이성적이면 안 될까. 하고 달래도 소용없었다. 목도리 하나 걸치지 않고 니트 한 조각만 입고서 나왔으니. 거지같았다. 떠는 몸 이고서 이곳저곳 배회할 존심만 남았다. 햇살에 몸을 쬐니 따뜻해지기는 한다. 정신 차려지는 것 같자 물었다. 어디서부터 문제였을까. 며칠쯤부터 적신호였을까. 스케줄을 뒤져봐도 아무리 뒤져도 모르겠다. 그을 수 없는 선 넘어 어리광부리던 순간과 패대기치려는 순간이 모호해졌다.

벤치를 지나서 한 발자국 내딛는 저 커플은 오늘로써 며칠 째일까. 저 홀로 외롭게 걷는 남자는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있을까. 사람들이 바라보는 유지애 나란 인간에게 1100일 정확히 천백일 째 깨졌다는 사실을 알기나 할까. 쪽팔림과 부끄러운 모호한 경계에 서 허둥지둥 대는 멍청한 유지애 바보 같은 유지애 지껄여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다시 카톡을 열었다. 지울까 말까 고민했다. 아직도 선언해선 안 되었다. 못 받아들이겠다는 거다. 아직도 1은 사라지지 않았다. 또 다시 전화를 거는 순간 말려드는 거다. 절대로 조용히, 입 다물고 있어 유지애하고 매듭졌다.

이쯤하면 연락은 주겠거니 예측했다. 틀려먹었다. 바짝 고개라도 숙여야 할지, 정면돌파할지 두 가지 갈림길에 서자 다리가 후들거렸다. 갑작스런 오늘의 날씨만큼이나 혼자서 홀로 서기에 돌입해야 할 유지애가 가련하고 불쌍했다. 그렇다고 널 만난 게 당당한 유지애를 바래서 만났던 건 아닌데. 어쩌다 네가 내 자리 한 가운데 서 있었을 뿐이고, 네가 있어 웃음꽃 피었을 뿐이고. 단지 너에게 패대기 한 번 쳤을 뿐인데 그 웃음꽃이 시들어 혼자서 겨울을 나야 한다는 게 슬펐을 뿐이고. 맞아, 후회해. 후회한다고. 그니까 제발 돌아오라고.

적당히 배회하다 돌아와 부장 눈빛 스캔하고 자리에 앉았다. 아무 일 없다는 듯, 잘해 한 마디 던지는 눈빛이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라디오에선 잔잔한 음악이 끝나갈 채비를 마쳤고, 사연을 읽으며 소박한 하루를 지껄일 테지만 나아졌던 마음은 또 다시 상승 곡선을 그려 내려갈 준비를 끝낸 것 같았다. 헤어지자는 네 글자 한 마디 본 순간 올라갔다 내려갔다 끝 보이지 않을 롤러코스터 오르고 내리다 또 오르고 내린다. 두 시간 배회했으니 그 만큼 늦게 나가면 되는데 상관없다. 어차피 야근이었으니까. 짜증이 밀려온다.

“유 과장님 대신해서 다 끝냈어요. 밀린 원고 오탈자 확인 했으니까 바로 편집 들어가면 되겠어요.”

대답하기 귀찮았다. 두 다리 쭉 뻗고 몸을 뉘었다. 퇴근할 시간이 되어서야 매듭지을 수 있었다. 좀 나아졌다는 걸 캐치했는지 나 아니었으면 유 과장님 큰일 났을 거라고 알랑방귀 뀌었다.

“여자친구랑 싸웠다면서?”

대답도 하기 전에 이런 말들을 늘여놓았다. 미안.

“맘대로 지껄여도 돼. 근데 처음이었다고만 말하지 마. 그거 추하니까.”

모니터에 올려둔 무슨 고교 학교신문 칼럼이 아른거렸다. ‘잊어버려야 할 때’ 최예림 학생의 이름으로 올라온 글을 읽다보니 참을 수 없는 눈물을 뚬뻑뚬뻑 흘렸다. 아오, 취기 오르지도 않았는데.

 

본문의 사진 속 여자 아이돌은 본지 편집 방향과 무관함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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