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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자유의새노래 편집방향: 신문에 새기는 물보라 같은 기록들

자유의새노래 2020. 12. 31. 23:00

입력 : 2020. 12. 31  23:00 | 디지털판

 

 

정의롭지 않은 일에 “정의롭지 않다” 사랑하는 일엔 “사랑한다”고
자유의 가치로 아로새긴 신문, 부끄럽지 않은 신문이 되겠습니다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사랑하는 대상을 말할 때의 설렘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습니다. 파르르 떨리는 입술로 또박또박 말도 못하는 그런 상황. 그렇지만 조금씩 한 발자국 내딛듯 좋아하고 사랑하는 대상을 그려가듯 표현한 기억이 생생합니다.


사랑은 단순한 마음의 끌림을 넘어서 우리 각자의 마음을 움직이게 만듭니다. 얼마만큼 시간을 쏟는가를 살펴보면 압니다. 따라서 사랑은 바라보는 즐거움, 함께하는 설렘, 다시 보는 짜릿함, 지루하지 않은 시간 속에서 반짝입니다. 사랑하는 대상에 빠지고서 재밌게도 단점만 보이지 않습니다. 긴 시간이 지나야 보이는 불편함에 다시 묻습니다. “너를 사랑하고 있는가.” 시험을 치르듯 불편한 감정 끝에 다시 사랑을 떠올리면 우리는 그 대상, 그 사람을 사랑한다고 확실하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사랑하나요?


◇모든 것이 무너지는 슬픔의 시대
슬프게도 제 사랑의 대상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전례 없는 코로나 파동으로 어디서나 지탄받는 제 사랑, 교회가 허무하게 쓰러졌습니다.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대형교회 전도사의 파수꾼 증언은 잊히지 않습니다. 신천지 파수꾼 전략이 아닙니다. 수많은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는 광경을 목격하며 자신을 교회에 남은 마지막 파수꾼으로 비유한 단어였습니다. 청년의 미망(迷妄·사리에 어두워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맴)을 다독여도 모자랄 교회가 오히려 교회의 미망(미친 망아지)적 행각에 다독이는 기괴한 풍경이 줄이었습니다. 더욱 슬프게도 교회 붕괴는 이제 시작일지 모릅니다.


침묵과 암전이 가득한 예배당 구석에 교회를 지키듯 서 있는 청년이 그들뿐만 아닙니다. 모든 전통이 흔들리고 침몰하는 ‘유동하는 근대’에 사랑의 자리도 돈과 허상, 만들어진 가치에 흔들립니다. 언론은 사이비 정보가, 과학은 대안 가설이, 여성은 대상화가, 신학은 신 죽음의 시대가, 사랑마저 진짜와 가짜들로 나뉘어 차가운 현대인의 가슴을 차갑게 만듭니다. 그래서 모든 침몰하는 절망의 시대에 슬픔을 기록했습니다. 이 신문에 말이죠.


◇다시 설정하는 주체자의 기록
모든 변해가는 시간 속에서 한 가지를 발견했습니다. 사랑도 변하고 가치도 바뀌며 신앙도 무너질 테지만, 사랑하고 있는 나 자신은 여전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 용기를 가지고 사랑하기 위해서 미지의 세계로 발 내딛는 긴장감. 그리고 사랑했는지를 점검하는 질문을 통해서 사람은, 인간은. 사랑하는 존재로 살아갑니다. 인간은 사랑할 때 고통을 느끼고, 사랑할 때 즐거우며, 사랑할 때 눈물도 흘리고, 사랑할 때 분노하는 다층적 사건들 속에서 살아있음을 느낍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기로 마음먹을 때부터 사랑하는 게 아니라 이미 사랑의 이끌림 속에서 누군가를, 무언가를 사랑하고 있었고 뒤늦게 깨닫습니다.


사랑으로 하나 되고 연결된 느낌 속에서 삶의 의미를 되찾습니다. 사람은, 인간은. 사랑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존재인거죠. 따라서 다시금 사랑하는 무언가가 있었는지 물었습니다. 사랑이 저를 하나 되게 만드는 무언가를 두리번거렸습니다. 그리고 찾은 것 같습니다. 시간의 경과를 보아야하겠죠. 살얼음판 같은 이 사회에서 진짜와 가짜로 나뉘는 만들어진 사랑보다 이미 존재하는 사랑에 귀 기울여야 한다는 설렘을 기록하고 싶었습니다. 따라서 제가 보고 느낀 그 사랑을 기록하겠습니다. 코로나로 보지 못했던 오히려 코로나로 보았던 풍경을, 사랑을, 절망과 아쉬움을, 지키지 못한 세계에서 보았던 파수꾼의 절절함을 외면하지 않겠습니다.


부끄럽지 않은 신문이 되겠습니다.


저 멀리 물보라가 보입니다. 밀려오는 풍경들을 자유의새노래에 담겠습니다.

 


 

말없이 바라보다


슬픔은 만날 수 없다는 데에서 시작한다
만날 수 있음은 너와 나의 바라봄을 의미한다
바라봄은 지금의 너 오늘의 나 내일의 봄 같은 우리다
우리는 만날 수 있어서 기쁘다


그런데 너가 없다.


시작은 만날 수 없다는 데에서 슬픔으로 밀려온다
바라봄의 의미는 너와 나의 만날 수 있음이라는데
우리는 내일도 오늘도 지금도 너와 내가 바라는 봄이라
슬프다. 만날 수 없어서 우리는.


네가 없는 이천이십년
파동으로 젖어버린 내 얼굴
불신과 증오와 불안과 슬픔이
내 어깨까지 차오른다.


너를 만날 수 없다는 지금이
너를 바라볼 수 없다는 오늘이
너와 봄을 꿈꿀 수 없다는 내일이
슬픔이다.


슬픔이다.
슬픔이다.
그런 너를
찾아간다 바라본다.
발을 뗀다

 



정의(定意)는 오히려 틀 안에 가둔다. 절망의 이유도 낙인에서 비롯하듯 화자는 슬픔과 만날 수 있음, 바라봄, 우리를 정의하며 슬퍼한다. 그러나 슬픔의 강도는 크지 않았다. 발을 떼며 만나고 싶은 너를 향해 걸어가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그러기까지 숫자로 이해 못할 시간들은 얼마나 길었을까. 만날 수 없고 따뜻한 봄을 바라지 못해서 생기는 슬픔은 화자를 정의라는 틀에 가두었다. 어깨까지 차오른 물살에 더는 슬퍼할 수만은 없게 되었다. 살아남기 위해 마지막 힘을 내어 발을 떼야 할 상황에 직면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