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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ㅇ루다가] ①하루의 기록을 모아, 한 권의 책으로 엮기까지

입력 : 2020. 11. 25 | B6

 

 

 

엄마한테 얻어터지고 울면서 쓴 일기엔 다짐이 적혀있다. “다음부터는 일기 열심히 쓰거다.” ‘게’도 아니고 ‘거’라고 써놓은 일기 말미엔 “그래요, 열심히 쓰세요”와 함께 쌍시옷이 덧 쓰였다. 쓰기 싫던 일기지만 초등학교 졸업을 앞두던 6학년에 이르러 일기는 7권을 맞이했다.


초등학교 2학년부터 지금까지 하루 일과를 기록했으니, 대략 17-18년 기록을 이어온 셈이다. 일기는 하루 있었던 사건을 나열하며 감정, 사건, 인물, 생각, 장소 등 그 시절 경험한 토대 위에 기술한 기록물이다. 강제로 쓰던 일기는 초등학교 2학년, 첫 권을 시작으로 6학년까지 총 21권을 적고 또 적었다.


기록 욕구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스케줄러, 사진, 의미 있는 기사를 담아내고 싶었고. 가계부, 북마크, 읽을거리를 망라한 복합 기록물을 개발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본지(本紙)라 부르는 자유의새노래도 기록의 욕구로 탄생한 신문이다. 인디자인과 노션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담임선생님과 주고받으며 즐거워진 일기 쓰기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 생각을 밝혔던 글, 일기는 2002년 3월 6일 뼈저린 반성으로 출발했다. 일기장 꺼내 놔라 하셔도 결연히 내놓지 않았던 일기에 맛 들린 건 그리 오래지 않는다. ‘읽기책을 찾았다’ ‘엘리베이터가 고장이 났다’처럼 문장형 제목에서 때로는 ‘눈’ ‘자동차 게임’ ‘마술쇼’ 등 단어형 제목으로 바뀌었고. 게임에 지고 나서 ‘아! 분하다’ 같은 다소 오글거릴 문장도 넣어가며 새로운 문체를 형성했다.


본격 글쓰기에 자존감을 갖추게 된 건 글쓰기를 싫어하던 소년에게 일기장 2권 째 발간을 축하해준 선생님의 응원 덕분이다. 응원이 끝이 아니다. 단지 내 생각을 기록할 뿐만 아니라 담임선생님이 적어주던 답변이 일기장을 열어보게 만들었다.

 

 


◇선생님께만 제공하는 서비스, ‘단편코너’
일기엔 하루 일과만을 담지 않았다. 격언이나 캠페인 같은 이벤트도 선보였다. 격언 하나 담아 놓은 책에서 받은 감명을 선생님과 나누고 싶었다. ‘약속을 가볍게 하는 사람은 믿지 마라(그리스격언)’ 그 위에 쓰인 4학년 담임선생님의 감사가 인상적이다. “멋진 명언이군요. 선생님도 혹시 약속하고 잊곤 하는데 이제 정신 차려야겠다. 고마워.”


알파벳을 줄줄이 써놓고 “O를 찾으셨습니다!” 같은 괴상한 이벤트도 있었지만 “나무를 사랑하고 아낍시다” “물어보기: 선생님! 생신이 언제예요?” 전학생 축하 메시지, 4월 4일엔 피 묻은 날짜 상자, 독도는 한국 땅, 일요일을 주일이라 부르던 기독교적 삶의 양식, 현충일엔 조기를 그려 기념하던 일기장은 흥미롭고 나다웠다. 특히 일기를 다 쓰고 나서 붙이던 ‘스마일’은 아무래도 월간지에서 따온 듯하다.

 

 

기록의 또 다른 이름 일기
반성으로 출발한 일기쓰기
어머니 검열에도 써내려가
초등 졸업까지 21권 집필


유일한 독자 담임선생님
선생님께 선보인 서비스
‘명언’ ‘제목 중’ ‘스마일’…
끼적이며 답변·질문도 해


일기가 가져온 좋은 기능
일기 끝에 부활한 감회록
단어 나열 아닌 문장으로
사건을 기억하며 성찰해

 


◇기획 기사처럼 두 면에다 할애한 기획 일기
초등학교 마지막 학년에 집필한 일기는 조금 독특했다. 학교 일과를 마치고서 쓸 일기 주제를 담임선생님이 정해주었기 때문이다. 고유한 편집, 집필 권한을 빼앗긴 기분이었는지 간간히 자유주제로 일기 쓸 기회를 주거든, 두 면 할애해 기획 일기로 작성했다. 일기 두 면이면 적잖은 분량이다. 5학년까지 기획 일기가 없었던 걸 보면 고유 편집 권한이 없어 반항(?)하려는 나름의 목적이 아니었을까.


9·11 테러, 한글날 기념 논설, 첫 사랑에게 보내는 편지, 예수를 믿는 이유, 요한계시록 강해 등 다소 선생님이 읽기에도 어려운 주제로 집필했다. 기획 일기라고 해서 대단한 내용은 아니었고 간편한 생각으로 구성해 논리적 글쓰기라 보기엔 힘들다. 다만 한글로만 설명하기 어려운 경우엔 직접 그림 그려 설명하며 의사 전달에 최선을 다했다.


◇단어들이 문장 되어 거대한 글쓰기 체계를 이루다
초등학교 졸업과 함께 일기는 자연스레 사라졌다. 글쓰기 공간을 채운 건 문장이 아닌, 단어뿐이었다. 스케줄러가 출현하자 교회의 설교처럼 색채 강한 글쓰기에만 매진했고 하루의 사건을 집필하며 성찰하는 삶이 줄어들면서 수필과 에세이 글쓰기가 사라졌다. 달력처럼 구성된 스케줄러엔 꽉 찰만큼 하루 일과가 쓰였지만 단어들에는 감정, 다양한 생각, 다층적 분석 대신 일관적 논리, 협소한 시각, 같은 것의 종교적 반복만이 남았다.


그럼에도 달력을 가득 메울 정도로 단어들이 문장으로 길어지자 새로운 기록 체계를 만들어야 했다. 학부 생활하며 일상을 기록하기 위한 목적으로 스케줄러와 일기를 포함한 일과속기록을 발간한 이유다. 속기(速記) 방식으로 하루 일과를 집필하며 반성과 성찰, 더 나은 계획 수립, 강의안, 인터뷰를 빠르게 작성하는 의미에서 일과(日課)속기록(速記錄)이란 이름을 붙여주었다.


◇디지털 기록물 시대와 감회록의 등장
두 해 가까이 손으로만 집필하다보니 많은 글을 담아내지 못한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한컴오피스 한글을 선택하기로 했다. 이동이 편한 노트북 덕분에 내린 결정이다. 작성한 일과속기록 디지털판을 책으로 엮는 방안을 결정한 것도 이 무렵이다. 이미 자유의새노래는 인디자인으로 편집 작업을 진행했기에 향후 책으로 제작할 계획을 염두에 두고 체계를 완비했다. 본격적인 디지털 기록의 시대에 진입한 것이다.


수기보다 타이핑이 수월했다. 덕분에 2015년 3만 3천자를 시작으로 ▲2016년 415,774자 ▲2017: 526,465 ▲2018: 467,304 ▲2019: 601,546로 한 해 평균 50만자를 기록했다. 다만 일과속기록은 발생한 사건 중심으로 건조한 글을 작성함이 목적이라면, 2017년에 개편한 기록물인 감회(感懷)는 무미건조한 객관적 사실들의 나열보다 글쓴이 중심의 감정, 생각, 주장, 판단에 주목해 발생한 사건 중심과 더불어 글쓴이의 주체적 생각에 초점을 맞췄다.


◇디지털과 상호보완 관계: 한 단계 도약, 인디자인과 노션의 결합
평소엔 한글 프로그램으로 집필하며 책으로 엮을 때만 인디자인을 사용하다보니 문제가 생겼다. 접근성이다. 그 동안 감회록은 노트북을 열어야만 집필 가능했다. 노트북 없이 여행 갈 경우, 감회록을 이어서 집필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노션(Notion)의 발견은 새로웠다. 올해 말, 감회록 집필을 노션으로 진행하며 언제 어디서든 일기를 작성하는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다. 한글로 일기를 작성하고, 노션에 업로드 한 후 한 해가 저물기 전, 한 권의 책으로 엮어 디지털로 열람 가능하도록 체계를 완비했다.


2006년 6월 15일 컴퓨터가 고장 났다. 덕분에 메이플스토리, 퍼피레드 자료뿐만 아니라 그 동안 구축했던 기록 체계가 붕괴됐다. 일기 아래 담임선생님은 이렇게 댓글을 달았다.


“컴퓨터가 고장 나서 어째? 역시 기계는 믿을 게 아니야. 기계는 인간에게 좀 더 편리한 생활을 위해 도움만 줄뿐! 기계에 의존하기 보다는 자신을 믿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