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20. 05. 06 | 디지털판
서울 동대문구에 위치한 빛과진리교회가 신앙훈련을 목적으로 위력(威力)을 가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교회는 자발적 참여라고 해명했지만 피해자들은 “인분(人糞)을 먹을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라고 폭로했다. 자발적인 활동이라 해도 교회의 리더가 되기 위해서 불편한 일들을 감수해야 한다니. 이런 곳이 어떻게 교회 인가.
있을 수 없는 훈련들의 배경은 신약성서를 기록한 사도 바울의 고난을 체험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6장을 근거로 성령의 감화의 경우 ‘산(山) 기도 3시간 이상 4회’를, 갇힘의 경우 ‘음식물쓰레기장 3시간 갇히기’ 등을 실시했다. 사실 성경에는 사도 바울의 고난을 당해야 한다는 구절이 없다. 시편에는 “내가 고난을 당한 것이 나에게 유익이 되었으니…”(119,71) 구절이 있을지언정 고난을 자처하라는 내용은 없다.
교인들을 피지로 보내며 노동을 착취하고 폭행을 일삼은 은혜로교회 사건과 그루밍 성폭력으로 상처를 준 만민중앙교회나 이번 빛과진리교회 사건들을 보면 한국교회가 가르치는 인간론의 실체를 볼 수 있다. 교인들을 죄인으로 만들고, 죄인임을 가르치는 목사 아래로 복속(服屬)시켜 주체성을 잃은 인간으로 만드는 일련의 과정들은 국민들에게 경악스러운 사건들로 선사한다. 한국교회의 교인 노동을 착취하는 폭력적 구조는 아주 오래 됐다. 교회가 급성장한 80년대부터 목사를 ‘주의 종님’이라 부르는가하면 담임목사를 비판해서도 안 된다는 문화가 지금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한국교회가 천박한 이유는 교인의 사고(思考) 판단을 중지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새능력이란 이름으로 등장한 집단도 하등 다를 게 없다. 세상이 타락하고 신앙인이 교회를 떠난다는 공포적 종말론 상황의 명제 하에 ‘성령과 회개’라는 명목으로 교인들을 죄인으로 만든다. 한 청년이 1평 남짓한 방송실을 떠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억지로 한 것이라면 부담 없이 내려놔도 좋다”고 말한들 힘겹게 봉사하는 교인들 속에서 어떻게 교회 임직을 그만 둘 수 있겠는가.
교회가 타락한 세상이라 지적하는 사회에서 인간은 인간 존재 그 자체로 이해한다. 따라서 학교가 필요하고 가족과 사회가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성장하는 존재다. 성장해야 하기 때문에 다양한 사건들을 마주하며 부딪친다. 다양한 사람, 환경, 사건들을 마주치며 스스로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주체적인 인간으로 자라나는 것이다. 교회 말마따나 목사라는 구원자를 상정하고 교회가 독점한 구원을 통해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건 중세적 사고와 다르지 않다.
단지 중독을 끊기 위해 중독 저변에 존재하는 현상을 ‘성령의 힘으로 하지 말아야 한다’는 수준의 교훈으로 가르친다면 인간의 다양한 속성과 양태를 이해하지 못한 처사다. 그런 교회에 코로나 파동(波動)이라는 쓰나미가 밀려왔다. 처음 세 달을 쉬어 본 교인들이 다시 교회로 돌아갈지 모르나, 점차 줄어드는 교인들의 한국 교회를 바라보며 ‘그 땐 만 명이 모이기도 했었지’라고 과거를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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