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9. 06. 17 | 수정 : 2019. 06. 20 | A17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라고 기도하지 마라. 세상일에 빠져 있으면서,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라고 기도하지 마라. 너 혼자만 생각하며 살아가면서.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시오며… 라고 기도하지 마라. 자기 이름을 빛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면서…….”
개독이라 불리는 교회를 향한 예수의 냉담함이 보이는 듯, 주기도문 함부로 하지 마라는 제목의 이 글이 무려 10년 전 유머 글이다.
마태와 누가, 마가복음은 비슷한 구절과 이야기들이 등장한다. 그래서 세 복음서를 공통된 관점이란 뜻에서 ‘공관복음(共觀福音)’이라 부른다. 요한복음을 펼쳐보라. 공관복음서와 구성도 다를뿐더러 ‘나는 ~다(εγω ειμι)’ 같은 표현법이 넘쳐난다.
주기도문은 마가복음엔 없고 마태복음(6,9-13)과 누가복음(11,2-4)에만 등장한다. 게다가 같은 구절이 아니라 마태는 길고, 누가는 짧다. 다른 것 하나 더 있다. 어떤 상황에서 예수가 제자에게 기도를 가르쳤냐는 맥락에서 다르다.
왜 다른 걸까?
◇마태복음: 교회 내 위계질서를 위해, 신앙교육과 훈련을 위한 문헌
이방인을 대하는 모습에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특징이 같다. 예수의 족보를 다룬 마태복음 서두에만 무려 4명의 여인 모두 이방인이자 이방인과 가까운 여자였다. 예수를 경배하러 온 이들도 이방인 동방박사였고 로마 백부장이 예수에게 칭찬을 받는가 하면(8,10), 예수의 죽음에 신앙고백한 이도 로마 백부장(27,24)이다.
하지만 윤리와 교회 위계질서를 다룬 점에선 서로 신학적 노선이 달랐다. 마태·누가복음이 동시대에 쓰인 문서가 아니기 때문이며 오히려 마태와 누가복음을 기록한 이들 관점이 달랐음을 보여준다.
마태복음은 윤리를 강조한 면에서 독특하다.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은 악한 종의 비유(18,23-35)나 포도원 농부 비유(20,1-16), 혼인 잔치의 비유(22,1-14)는 “‘주여 주여’ 하는 자만이 천국에 갈 수 없다”고 한 준엄한 경고에 살 떨리게 만든다.
다른 복음서와 달리 마태복음은 교회의 위계질서를 다뤘다. 마가복음에 비해 마태복음은 제자들을 향해 책망한 내용을 누락하거나(마가 4,13; 마태 13,36) ‘믿음이 적다’는 수준으로 희석한다(마가 4,40; 9,19; 마태 8,26; 17,20). 사도 중심에서 벗어나 힘을 가진 이들 중심으로 이루어진 계급구조를 향해 강력히 경고한다(20,25-28; 23,8-12).
교리문답을 위한 책이기도 하다. 신앙훈련과 신앙 교육을 위해 기록된 교과서인 셈이다. 치리 문제(18,15-35)를 다룬 구절과 세례 예문(28,19)이 그 예다.
마태복음은 신앙교리서
비유를 통해 용서와 위계질서 통해
복음서를 신앙교리화 해… 頌榮이 그 예
누가복음은 가난한 자에 초점
누가복음 쓰인 이유도 가난한 자에게
복음 전하기 위해… 여성, 세리에 우호
서로 다른 복음서의 주기도문
용서와 위선을 가르친 마태 주기도문,
누가는 신의 응답에 초점 맞춰 가르쳐
◇누가복음: 가난한 자와 예수의 사역에 초점을 맞춘 문헌
교회 내 위계질서 확립과 신앙교육을 위한 마태복음과 달리 누가복음은 가난한 자에 초점을 맞췄다. 성육신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함이다(4,18). 복음서가 쓰인 당시 가난한 자란 사회적 지탄을 받은 세리(세리 레위: 5,27)와 죄인(7,34), 그리고 인간으로 취급받지 못한 여성(엘리사벳, 안나, 나인 과부, 혈루증 앓은 여인 등)이다. 예수의 성육신 목적을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한 점(4,18), 산상수훈에 등장한 심령이 가난한 자를 ‘마음이 가난한 자’로 정의(6,20)한 부분도 그렇다.
아브라함에서부터 내려오는 예수의 족보를 담은 마태복음과 달리 아담에서 시작하는 누가복음 예수의 족보에서 저자의 관심이 선교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편집이 아닐까 의문을 품게 한다. 사도 1,8처럼 온 유대-사마리아-땅 끝까지 확장한 걸 보면 그렇다. 그래서 역적 취급 받은 사마리아 사람들에 기울인 관심은 다른 복음서와 확연히 다르다. 이를 테면 사마리아 사람의 한 마을에서 문전박대 당하고 나서 제자들이 저주를 요청하자 꾸짖은 사건(9,51-56).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10,25-37), 사마리아 병자만이 예수에게 돌아온 사건(17,11-19)이 있다. 마태복음에서처럼 “이방 사람의 길로도 가지 말고, 또 사마리아 사람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라”(10,5-6)는 구절과 대조된다.
예수의 죽음과 수난은 어느 복음서, 바울 서신에 등장하지만 누가복음은 죽음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활동에 초점을 맞춘다. 바울이 예수의 구원을 십자가에 죽어서 일어났다고 강조한다면 누가는 예수의 구원 활동을 강조한다.
◇위선과 응답을 가르친 마태·누가복음 주기도문
그렇다면 마태복음 주기도문(6,9-13)과 누가복음 주기도문(11,2-4)은 무엇이 다를까.
마태복음에서 예수는 산에서 무리를 가르쳤다(5~7장). 우리는 이를 ‘산상수훈’이라 부른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과 슬퍼하는 이들, 온유한 사람들, 복 있는 삶을 재정의하고 본격적인 인간으로서의 삶을 가르친다. 율법과 살인, 간음. 그리고 이혼과 거짓 맹세, 폭력을 재해석하며 인간 내면에 가득한 속이려는 마음, ‘위선’을 지적한다.
예수의 주기도문도 이러한 맥락에서 등장한다. 자선은 칭찬받기 위한 행동이 아니며 기도 역시 누군가 들어주길 바라는 마음이 아니어야 한다. 기도는 숨어서 보시는 아버지께 해야 하며 이방 사람처럼 중언부언(빈말)하지 말 것을 가르친다. 이미 하나님은 인간의 필요를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말씀한다.
마지막 “나라와 권세와 영광…” 부분은 후대 사본에서 등장한 구절로 오래된 사본엔 없다. 오늘날 개신교와 가톨릭 성서엔 반영하지 않았으며 찬송가 송영(頌榮)처럼 불렀을 것으로 추측한다.
예수는 기도문을 끝맺고 놀라운 한 가지를 밝힌다. “너희가 남의 잘못을 용서해 주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해 주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남을 용서해 주지 않으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해 주지 않으실 것이다.”(6,14-15) 예수가 주기도문을 가르친 ‘위선’은 용서하지 않는 삶도 포함한 걸까. 만 달란트(엄청난 금액이다!) 탕감 받은 종이 고작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용서하지 않은 ‘매정한 종의 비유’는 오로지 마태복음에만 나온다.
누가복음은 상황이 좀 다르다. 산상수훈과 달리 평지에서 가르치다(6,17) 제자들이 나서 “요한의 제자들처럼 우리에게 가르쳐주십시오” 부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끊임없이 간청해야 할 것과, 우리 모두 읊조리는 유명한 구절 “구하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그리하면 찾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어 주실 것이다”(11,9)를 가르친다. 간절한 기도에 응답하지 않을 매정한 아버지가 어딨겠냐는 가르침이다. 다른 복음서와 달리 ‘성령’을 강조한 누가복음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사람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11,13)고 말한다.
추측컨대 마태복음 주기도문이 더 긴 이유는 교회에서 신앙문답이나 공식기도문으로 사용하려다보니 ‘아버지의 뜻’과 ‘악에서 구하소서’ 부분이 첨가 되었고 송영인 ‘나라와 권세…’를 넣은 듯하다.
말씀을 마치자 무리는 놀랐다. 율법학자들보다 권위 있게 가르쳤기 때문이다(마태 7,28-29; 누가 4,32). 그러나 예수의 가르침과 달리 형식적으로, 지극히 주관적으로 사용하는 건 아닌지.
바티칸 교황청 발(發) 소식, “유혹으로 이끌지 마시고”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로 바꾸겠단 결정에 무슨 이유로 “시험에 들지 말게 하시고”로 개신교회가 호들갑 떠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가톨릭교회 입장에서 방언으로 중언부언하는 개신교인이 엉뚱하게 보일 것이다.
'연재완료 > 신학; 신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만화성경이 재미없는 이유 (0) | 2020.01.11 |
---|---|
[교회 安 이야기] ‘언제부터 우리가 노예였던 거지?’ (0) | 2019.12.19 |
[신앙칼럼] 잘 되어도 은혜, 못 되어도 은혜, 모든 것이 은혜 (0) | 2019.05.18 |
이재록 성폭행 증언에도 “그럴 리 없다” (0) | 2019.02.18 |
[교회 安 이야기] 탈 교회를 생각 중인 만민중앙교회 성도들에게 드리는 편지 (0) | 2019.01.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