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과속기록] “서른즈음에”

2017년 10월 26일

지난 주일, 서울을 다녀왔다. 나에게 중요한 기념할 만한 일들이 벌어진 날이기도 했고, 쉬고 싶었기 때문이다.

사랑의교회 갱신위원회-명동성당을 오가며 저녁, 이화여대로 향했다. 이 날 여행의 꽃은 꽃케이가 첫 뮤지컬을 선보인 ‘서른즈음에’였다. 뮤지컬을 위해 여행을 다녀왔다고 해도 틀리지 않다.

케이도 나도, 뮤지컬은 처음이었다. 대기업 차장인 주인공 이현식이 고단한 헬조선에서 힘겹게 살아내는 내용으로 시작한다. 어느 날 한강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우연한 기회로 과거, 가장 아름다웠던 청춘 스물아홉 때로 돌아가면서 이야기가 전개 된다.

‘그 땐 그렇게 하는 거였는데’라는 푸념으로 시작해서 ‘이렇게 살아야지’라는 결심으로, 주인공은 자신이 마음에 품고 있던 그녀에게 고백하여 교제하게 됐고 어머니로부터 음악을 인정받는 쾌거를 이루지만 음악에 몰두한 나머지, 차이고 어머니가 운영하던 반찬가게는 불명의 화재로 전소된다.

두 마리의 토끼를 잡았지만 한 순간에 두 마리의 토끼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과거를 회상할 때마다 가당찮다고 하면서도 “그땐 이렇게 했어야 했는데”하는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설상가상, IMF가 터졌다. 모두가 공동의 십자가를 져야했다. 머리에 띠를 두르고 시위에도 참여했다.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대로 차에 치여 죽을 이현식으로 살아야 할 판이다.

도대체 케이는 언제 등장하는 걸까 “현식 선배!”라며 “옥희? 오키~!”하던 저 평범한 여자 분이 케이였을 줄은 몰랐다(…). 그렇게 옥희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현식을 도왔고, 챙겨줬다. 숙취 때문이라며 박카스를 건네 준 장면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래서 고민했다. 왜 감독은 옥희를 넣었을까. 옥희를 통해 하고 싶은 말이 뭘까.

쉬는 시간 15분 동안 글을 쓰기 시작했다. ‘옥희를 잊지 말자’고. 도대체 그 옥희는 뭘까 고민하다 공연은 시작됐고, 드디어 옥희를 통해 하고자 하는 말을 알아차렸다. 바로 ‘현실’이자 ‘일상’이었다. 외면하고 싶은 고통스러운 일상을 도외시하는 인간의 모습을 묘사했던 거였다. 일상은 우리와 떨어질 수 없었고, 떨어지지 않았다.

공강 시간, 벤치에 누워있을 때도. 작사 작곡 중에도, 가게가 전소 돼 잿더미가 됐을 때도, 마지막 옥희가 휴학 결정을 내린 술자리에서도. 옥희는 현식을 사랑했다. 모르는 있던 건 현식뿐이었다.

달라진 건 없었다. 그런 옥희 마저 현식을 떠나고자 했다.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대로 영영 옥희를 붙잡지 못하는 건가 싶은 찰나에 고백했다. “그걸…. 왜 이제 말해!” 현식의 가슴팍을 때리는 옥희 뒤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옥희라는 빛이 마음에서 반짝였다.

현식은 결정했다. 자기를 다시 2017년으로 데려달라고. 눈이 뜨인 곳은 병실이다. 아들이 몰래 기타를 사도, 직장에서 책상이 화장실 앞으로 옮겨가고, 이혼하자며 소리치는 아내가 있어도, 일상으로 돌아가길 바랬다. 남편이 깨어나길 기도하며 울고 있던 아내에게 오랜만에 이름을 불렀다. “옥희야 사랑해” 그러자 “나도, 현식 선배”라고 답하는 장면에서 막이 내린다.

사실, 자신 없다. 그렇게 대차게 까대던 11년 전으로 돌아간다 한들, 용기 있게 살 수 있을지. 또 다른 선택에서 벌어질 새로운 선택에 용기 있게 살아낼 힘이 중요하지 않을까. 그래서 어제 일을 연대별로 정리하고 분석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행동 방식에서 돌아설 수 있게 됐다. 그 전환점이 작년 10월 22일이다. 드디어 제도권 교회를 나와 제 3자의 시각으로 교회를 보게 되면서 현실을 인식하지 못하도록 만든 그 책임에, 용기 없이 신적 개입을 남용하는 자세가 있음을 깨달았다.

과거는 그렇게 비참하지 만은 않았다. 중요한 건 지금 어디에 서 있느냐는 거다. 젊은 현식과 중년 현식이 현재를 노래하는 장면에서 소망을 잃지 않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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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과속기록] 4박 5일, 오사카에서의 마지막 밤

간사이(関西) 지역은 도쿄와 달리 압도적이었다. 교토와 오사카. 평범한 도시라기엔 각자의 색채가 진했다. 가을 웜톤으로 물든 교토의 각진 건물들, 화려한 간판으로 물든 오사카의 다채로움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우리 연인은 4박 5일을 이곳에 머물며 일본의 진한 내음을 즐길 수 있었다. 도쿄의 여행이 아카사카를 기반으로 둘러보는 도시 관광이었다면 간사이 여행은 결이 달랐다. 교토, 오사카의 숙소를 기반으로 은각사와 청수사, 도톤보리와 우메다 등을 돌아다니며 각 도시에 맞는 색깔을 경험했다. 감격은 호텔 앞 택시에서 내렸을 때부터 시작됐다. 노란 모자를 쓰고 하교하는 초등생들, 가모강(鴨川) 부근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여고생의 가벼운 미소, 정류장을 지나갈 때마다 안전 운행하는 영혼 없는 버스 기사의 목소리까지. 오래된 신사 후시미 이나리에서 본 일본 고유의 건축물, 이치조지(一乗寺)에서 체감한 일상의 상가 건물들은 가슴을 푸근하게 했다. 어딜 가나 갓길 주차 하나 없는 깔끔한 골목, 오래된 역사(驛舍)임에도 깔끔한 마감의 타일, 제각기 독특한 형체를 갖춘 주거지와 상점가. 고유한 개성 속에서 느껴지는 일본의 질서를 온몸으로 체득하자 감동을 느낀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우리는 일본인의 깍듯한 예의와 태도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숙소까지의 교토역 길목에서 대접 받은 택시 기사의 정중함. 프론트에서부터 우리를 기다리던 직원의 단정함. 우리가 사온 사발면을 거절하지 않고 기꺼이 식당의 자리를 내어준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다정함. 나는 문득 무엇이 이들을 일하게 만드는 것일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나와 같은 관광객을 한두 명 대한 게 아닐텐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첫 일본여행과는 달리, 두 번째 여행에서는 일본에 대한 환상에 금이 갔다. 모든 일본인이라고 친절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우리를 딱딱하게 대하는 사람들도 보았다. 삶에 치여 고단하게 사는 현대인의 모습은 세계를 막론하고 어디서든 존재했다. 불친절한 태도에 기분이 나쁘기도 했지만 곧바로 당신들의 치열한 일상이 떠올랐다. 그래서 내 입술에선 “고멘나사이(ごめんなさい)”가 때로는 “아리가토고자이마스(ありがとうございます)”가 흘러 나왔다. 굳어 있는 표정 속에서도 굳이 나의 인사를 받아는 주었다. 30년을 한국에서만 살았으니, 이곳 일본에서의 경험은 즉각 한국과 비교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본 일본의 기억 조각들을 모으고 모아 봐도 우리를 대해준 모든 일본인에게 고마울 뿐이었다. 각자가 고유한 색채를 지켜나가는 삶의 강인한 체력에 감복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야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 먹고사니즘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보이지 않는 힘을 일본인을 보면서 느꼈다. 치열하지만 강인하게 살도록 만드는 힘 말이다. 친절하든, 친절하지 않든 말이다. 여자친구와 오사카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내며 지난날을 돌아보았다. 우리의 결론은 여행을 마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간다 해도 아쉽지 않다는 점이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 돌아다녔고, 후회하지 않을 날들을 일본에서 경험했다. 일본은 일본만의 삶의 결이 있고, 한국은 한국만의 독특함이 있다는 감동을 마음에 새길 수 있었다. 나에게 4박 5일, 짧지 않은 일본 여행이 한국을 더욱 사랑할 수 있는 선물이 되었다. 역설적이게도 일본인의 따뜻하면서도 각진 대접을 받으며

[일과속기록] 작은 거인과 ‘문장의 힘’

선배의 다급한 요청을 외면할 수 없었다. “학부 3학년임에도 수습기자부터 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이었다. 페이스북 메시지에는 절절한 사정이 담겨 있었다. ‘오죽하면 나 같은 사람까지도 필요하단 말인가’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학보사는 학생실천처장과 정치적 싸움에서 밀리던 상황이었다. 지원이 끊겼고 인쇄비마저 없어 허덕이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거절했다. 대학원 진학이라는 꿈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결과적으로 진학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2010년 침신대학보는 이사회와 싸움을 벌여야 했다. 한 구약학 교수를 지키려고 학보사가 나선 것이다. 이사회는 자유주의 신학과 학력위조라는 핑계로 재임용에 반대했다. 이 사실을 보도하기 위해 기자들은 붓을 들었다. 사실을 그대로 보도하려 했다. 그러나 편집의 손길은 끝내 톱기사를 킬(kill)했고 딱 그 부분만 백지로 발행되고 말았다. 2년의 군 휴학. 다시 돌아온 학교에 이미 학보는 사라진 상태였다. 동기와 후배들에게 물었다. 학생실천처장과의 다툼 때문이란다. 직접 학보사에 265호를 요청했다. 파일을 받을 수 있었다. 뼈만 앙상한, 아래아 한글로 겨우 조판한 흔적이 역력했다. 탄식이 흘러나왔다. 현실은 가혹했다. 정치적인 싸움보다 더욱 비극적인 것은 학생들의 무관심이었다. 아무도 학보를 읽지 않았다. 글조차 기고하지 않은 환경이 신문을 옥죄기 시작했다. 동료와 후배들은 학보사에 가입하려던 나에게 쓴소리를 남겼다. “학보사 애들은 사상이 이상해” “맞춤법도 안 지키는 애들” “좌파 사상에 빠진 것들” 박근혜 탄핵이라는 거대한 국민적 사건 앞에 자기 살길 찾느라 바빴던 것이다. 그리고 이사회 파행이라는 전례 없는 사태가 오래도록 벌어졌다. 총장 직무대행을 둘러싸고 학생들 사이에서는 소문만 무성했다. 누구도 정확한 정보를 다루는 이 하나 없었다. 침신대학보의 빈 자리가 크게만 느껴졌다. 지금도 상상해 본다. 학보사에서 일했더라면. 부족한 일손을 도왔더라면. 수습기자가 어렵다면 내 가진 편집 실력으로 신문이라도 만들어 볼걸. 처음 공적인 신문을 내 손으로 만들어 봤더라면. 대학을 졸업하고도 유일한 후회로 남았다. 지면신문이 사라지는 시대에 도달했다. 신문 열독률은 10%대로 떨어진지 오래다. 보는 시간 ‘30초’로 따지면 피부에 더 와닿을 것이다. 가짜 뉴스가 영상 매체를 통해 침투하고 있다. 대국민 공론장은 광고와 잡담, 농담 따먹기로 전락하고 말았다. 학보사의 기억이 떠오른 이유가 있다. 며칠 전 나는 작가에게 이 신문 자유의새노래 원고를 청탁했기 때문이다. 답변이 늦을 줄 알았다. 아니 거절당할 줄 알았다. 수습기자를 청탁 받던 그때의 나는 선배를 통해 완곡하게 거절했기에 그래서 업보로 돌아올 줄 알았다. 돌아온 건 생글한 답변이었다. “감사한 마음으로 원고 청탁을 받겠습니다.” 작가에게 부탁한 것은 한 가지다. 쓰고 싶은 글을 쓰라는 것. 작가의 글에서 완벽히 어그러진 것 같으나 그 어그러짐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했으므로. 청소년 문학소설 ‘완벽한 사과는 없다’에서 주인공 지민이 다온과 리하를 바라보며 가혹한 현실을 마주하지만 힘이 될 문장을 짓는다. ‘짧은 문장이 떠올랐다. 나는, 우리는, 무력하지 않다.(……) 가늘지만 질긴, 쉽게 구부러지지만 부서지지는 않을, 지팡이처럼 디딜 수 있는 문장이었다’(93,3) 사실 사람들이 좋아하는 글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이것만은 분명히 안다. 불완전해 보이는 작가의 문장이 폭풍우를 견디게

[일과속기록] 네 삶 속으로

불가지론자인 내 취미는 기독교인 관찰이다. 한국에서 꽤 많은 종교인을 보유한 개신교는 다른 종교와 다르게 사람들이 다채롭다. 시간 순으로 나열하자면 상고적 토테미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부터 우주를 뚫고 신과 한판 승부 보려는 이들까지 광활한 경계가 흥미롭다. 개신교인 분류 속에 다시 샤머니즘과 현대 기독교로 나뉜다는 걸 사람들은 알까. 넓디넓은 스펙트럼 안에서 ‘저 사람은 어떤 삶을 살까’ 관찰한다. 한 달에 두 번 방문하는 전문의도 대상이다. 처음엔 교회 집사나 장로라고 짐작했다. 책장에 가득한 조직신학서, 성경책, 컴퓨터 화면 속 숨은 신학 논문까지. 어쩌면 목사일지 모른다. 지하 약국 들렀다가 낯익은 이름의 기독교 서적을 집에서 검색해보았다. 같은 사람이었다. 의사를 겸하면서도 목사를 하다니. 대단했다. 약사도 읽던 중인걸 보면 이곳저곳 전도에 충실한 모양이다. 진료를 마치자 시간이 남았다. 내 직업이 기자라는 것 정도는 알던 사이다. 슬쩍 교회를 다니냐 묻기에 나도 모르게 “전공은 신학”이라고 답했다. 그리 답하는 게 아니었는데. 하필 전문의가 졸업한 학부와 같은 학교였다. 자신이 집필한 창공한 하늘색 저서를 가져다 싸인 후 선물했다. 보름 지나 진료 예정이니 그때까지 읽어야 하나 고민했다. 성서신학이 아니라면 읽지도 않는데. 더는 나 스스로를 기독교인으로 분류하지 않는다. 기독교 핵심 교리를 일부 변형해서 믿거나 어떤 건 아예 믿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원죄론은 믿지 않지만 부활은 희미하게 믿으면서 재림은 또 믿지 않는 짬뽕 신앙이다. 늘 종교는 없지만 신은 믿는다고 말하는 이유다. 열에 일곱은 무책임한 정체성에 의문을 가한다. “그런 신앙도 있나요?”라고. “그게 왜 불가능하냐”고 반문한다. 신학 박사까지 취득한 전문의도 그런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전문의 전공처럼 조직신학은 경직된 성서를 촉촉하게 만든다. 그러나 성경은 드넓은 이 땅 지구의 문제를 다루기엔 한정적인 메시지다. 변론이랍시고 부드럽게 내뱉은 대답은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 미약하게나마 영향력을 발휘한다. 그저 믿기 때문이고 믿어야하기 때문인 신앙이다. 그럼에도 경직된 교리는 신자들에게 일시적인 위안 정도는 제공한다. 며칠 전 나는 신을 죽이고 싶었다. 고단한 삶 틈으로 스며들 경직된 교리란 없었다. 신 정도는 믿으니까 내뱉은 원망이었다. 그래도 성서는 지혜문학을 통해 ‘겸손히 살라’고 일갈한다. 그 시간 너의 것이 아니라 신의 것이라고 말이다. 짜증나게도 신은 하룻밤 불평불만에도 오늘의 마실 공기와 시간을 베푸는 것처럼 군다. 까닭 없이 지구가 존재함에도 신은 인자한 미소나 지으며 자기 세상인 마냥 근엄한 척한다. 나그네 되어 묵묵히 임차 받은 지구를 가꾸며 사는 삶. 내 것처럼 소유하는 게 아니라 내 것처럼 쓰다 돌려주는 삶을 생각했다. 어차피 이 지구는 인간의 것도 신의 것도 아니지 않은가. 욕망 섞어 천국을 만들어갈 때 끔찍한 지옥을 마주할 뿐이다. 어차피 자기 것도 아니면서. 서신서는 나그네의 삶을 강조한다. 이 땅, 너의 것이 아니라고. 신조차 이 지구를 자신의 것이라 생각할 때 심판 받았는지도 모르겠다. 신의 이름으로 이 지구를 가지려 할 때 등장한 모든 비극적인 사건들이 뒷받침한다. 이제는 죽어서 받을 심판 개념을 믿지 않는다. 이 세상에서 받을 업보라고 생각한다. 기독교인인 척하면서 기독교 시장에서 돈

[일과속기록] 교보문고 대전점

학부 시절 매일 가다시피 찾아갔다. 지금도 첫 순간을 기억한다. 이 좋은 델 이제야 오다니. 특유의 향기 속에서 탄식 섞인 감탄이 흘렀다. 몇 년 만일까. 코로나19가 한창이던 지난 11월 입구 앞에 서자 반가운 마음에 미소를 머금었다. 익숙한 글판. ‘이토록 넓은 세상에서 이토록 많은 사람들 중에 나는 당신을 만났다’ 이젠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로 바뀐지 오래인 듯하다. 중앙에 위치한 카페를 지나쳐 제일 먼저 달려간 곳은 기독교 코너였다. 늘 그랬듯 ‘볼 게 없다. 볼 게 없어’ 내뱉을 뿐이다. 음악과 철학, 인문 코너에 이르자 학부 시절 조별과제가 생각났다. 항상 총대를 메었기에. 오래된 책을 찾거든 도서관으로, 싱싱한 책 찾으려면 이곳으로 향했다. 간학문(間學問) 명목으로 과제에 필요한 책을 이곳에서 헤매었다. 하여 단행본과 논문까지 포함해 열군데 인용한 처음이자 마지막인 기독교윤리 최종점수가 떠올랐다. 과제는 열심히 했지만 수업을 세 번이나 빠진 고로 처분 받은 C+이 되살아났다. 선배와 마주친 우연도 생각났다. 한없이 신세만 졌으므로 모른 체 넘어가고 싶었다. 정다운 인사를 건넨 선배를 피하지 못했다. 미안하고 죄송하다는 대답만 흘린 매대 앞, 교복 입은 여학생 남학생 무리가 스쳐갔다. 선생님 향하여 가리킨 손가락이 그저 부러웠다. 소설 코너에 이르자 청소년 문학을 살폈다. 잠실에 비하면 귀여운 수준이지만 낯익은 책에게 눈인사를 건넸다. 인생에 몇 없는 힘든 시기에 접한 소설 앞에 섰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허상의 세계에 몸을 기대었을까 물었다. 가능하지 않을 것 같은 가능성으로 돌아온 상상의 힘이 이 자리에 설 때마다 솟아났다. 그 힘은 다채로운 지식을 모아 하나의 소설로 엮어낼 능력을 안겨주었다. 지금은 낯선 직원만이 곳곳 돌아다니며 서고 정리 중이다. 의자도 사라진지 오래다. 핫초코 마시며 과제 위한 독서에 여념인 내 모습을 생각했다. 그때 나는 참 열심히 살았지. 지금 이 일로 먹고 살 줄 꿈에도 몰랐는데 말이야. 괴로워하고 불안해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속까지 따끈한 핫초코 내음을 졸업 앞둔 마지막 순간까지 즐겼다. 추워지던 가을이었다. 카페에선 항시 스탬프 이벤트를 진행했다. 열 번 다 찍으면 음료 한 잔 무료로 준다기에 성실히 사 마셨다. 사실 눈여기던 직원이 있었다. 그분 계실 때만 주문한 덕분에 마지막 도장도 그분 계실 때 찍으리라 다짐했다. 하루 이틀 일주일 지나서도 안 보이자 그만뒀나 싶어 마음의 갈등 속 마지막 한 잔 사먹었다. 다음 날 거짓말 같이 출근했다. 새 카드 내밀자 “다 찍으신 거예요?” 물었고 서로가 아쉬워했다. 코로나는 그조차 모른다고 말하듯 카페를 매대로 치워버렸다. 덕분에 수많은 이름들 속 문예은도 지워져버렸지만 나는 기억한다. 저녁 9시 45분이면 영업 종료 방송이 나온다. 지겨운 학교로 돌아갈 생각에 발걸음은 무겁지만. 헤어짐이 있으면 다시 만날 그날도 온다는 사실을 되새기며 나설 채비를 마치곤 했다. 발걸음을 멈추게 만든 마감 음악 ‘Good bye’. 그때마다 꼿꼿하게 서서 가사를 음미했다. 오늘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 노래는 오르골 멜로디였다. 낭만적으로 기억을 연주하는 작은 음악가 앞에서 바뀌어가는 그림을 가늠했다. 오래도록 머물고픈 그리움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서 있었다. 교보문고 대전점은 복학하기 1년 전인 2016년 재입점했다. 2007년 이후 9년 만에 다시 연 셈이다. 입점 무렵 글판이 인상적이다.

[일과속기록] 보고 싶은 새끼

진지한 대화를 마쳐도 미동 않는 녀석을 쳐다보며 한 숨만 쉬었다. 휴학을 선택하면 어떤 결과가 기다리고 있을지 자명했다. 4년은 마쳐야 않겠냐는 지극히 당연한 말들에도 대답이
Today소랑 2026년 6월 21일 일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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