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반성하기 위해, 필요한 감정은 수치심이다.
수치심을 제 빨리 거둬버리고 싶은 게 인간 심리다. 가능하면 빨리 거둬버리고 싶다. 잊어버리고 싶기도 하고. 하지만, 살면서 수치심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깨달았다.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인간을 탐구하고, 나 자신을 인식할 때 경험되어지는 ‘수치심’은 반성을 유도하기 때문이다.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기 위함도 있지만, 인간 성숙을 인식하기 위한 감정이다.
법정 소송을 지독하게 당한 목사를 보며 느꼈다. 고통을 준 그 인간은 호의호식하며 의사로 잘 먹고 잘 사니, 당연히 질투 날 법하다. 수치심과 다른, 어떠한 분노를 느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 목사는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해석해버렸다. 죄인이라는 걸 깨닫게 하기 위한 장치였다고.
목사에게 ‘나는 은혜 받은 인간’, ‘너는 은혜를 모르는 저 세상의 인간’이란 등식이 등장했다. 설교 때마다 은혜를 설명하기 위해 소송을 건 인간을 설명했지만 나는 그가 여전히 분노를 해소하지 못했다고 느꼈다. 마땅히 느껴야 할 분노를 해소하지 못한 채, 너무 분노해 다른 감정인 ‘은혜’로 덮어버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인간에게 분노를 느낀다면, 충분히 분노와 질투를 느낄 필요가 있다. 목사는 충분히 그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른 해소 방법을 찾아야 하지만 찾지 못한 모양이다. 그러다 우연히 마주친 하나님의 현존, 은혜. 또 다른 감정으로 감정을 덮어버리고 말았다. 지금도 그 인간은 ‘적’이자 ‘타자’일 뿐, 제 3자나 과거의 인간은 아니다. 분노가 현재진행형인 탓이다.
5년 전 일이다. 한 청년이 구속됐다. 방화죄로 말이다. 사건 개요는 간단하지 않다. 방화 대상인 교회에서 교회 생활하던 쳥년이, 어느 날 교회 목사(세 번째 문단의 목사와는 다른 목사다)로부터 성폭행 범으로 몰리고 말았다. 청년에 의하면 교회 식구 중 여학생과 친밀하게 지내다 괴상한 소문에 시달리게 됐다고 한다. 목사는 구속된 청년에게 자신의 죄를 고하고, 자신이 죄인이란 사실을 깨달으라 강조했다.
자기 죄를 고백하고, 형을 살게 되었다. 그리고 출소했다.
정신승리는 인간에게 치명적인 독이라 생각한다. 자기 잘못을 보지 못하고, 자기 결함을 하나님의 은혜로 눙치기 때문이다.
은혜로 재해석하다
법정 소송으로 고통당한 목사, 사건을 은혜로 해석해 분노 감춰버려
목사로부터 모함 받은 청년, 목사 권유에 의해 은혜로 사건 재해석
은혜여도 용서하지 못하다
여전히 소송한 인간을 용서하지 못한 목사,
모함한 목사를 두고 분노한 청년… 예수도 상인 내쫓고 욕해
수치심은 누구나 느껴
분노를 넘어 수치심마저 부정하자 말하다 “인간이면 누구든지 느껴”
분노를 해소하지 못해 은혜로 해석하는 걸 나쁘다고 보진 않는다. 그러나 자신이 분노한 사실을 부정하며 분노하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는 건 잘못됐다. 자신의 과거사를 은혜로 해석하는 건 자유이지만, 자신을 넘어 청년의 기억마저 왜곡하는 건 문제다. 여전히 청년은 자신에게 모함 받은 목사에게 분노한다. 현재진행형이라는 점에서 치명적이다.
용서와 은혜라는 행위로, 분노했던 기억을 왜곡시키고 마치 없었던 일이며 독이었던 사건으로만 인식한다면 곤란하다. 그런 의미에서 목사는 청년을 모함한 인간의 진상규명을 촉구했어야 했다. 준엄한 법의 심판으로, 성폭행했다는 거짓 모함을, 한 청년이란 인격체를 말살한 ‘죽음의 신앙’에서 변호해야 했다. 왜 목사는 침묵했을까. 변호인이 되어주지 못한 목사는 그게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위한 장치였다고 해석해버렸다.
감정은 해소되지 못한 채 미궁으로 빠져버렸다. 은혜라는 단어가 주술적 언어가 되었고, 용서해야만 기독교인 될 수 있다. 기독교인의 자격으로 변질된 것이다. 용서되지 못한다면 은혜 받지 못한 자다. 그렇게 스스로를 억누르며 강제 용서를 해버리고 말았다. 내가 인간으로서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과 나를 모함한 인간에게 분노를 느끼는 건 별개 문제다. 죄인이라는 감정적 행위로 모함한 인간에게 느낀 분노를 덮는다고 해서 달라질 문제가 아니다. 모함한 인간은 법의 심판을 받도록 심판으로 분노를 해소해야 한다. 청년의 인간성과 인격체를 말살한 거짓 모함에 관해 분노하는 건 결코 복수가 아니다. 인간으로서 살기 위한 조건을 지키기 위함이다.
예수는 곧 무너질 성전 앞에 상행위 중이던 상인들을 내쫓고, 둘러 엎어버렸다(마태 24,12). 때론 독사의 새끼라는 입에 담기 어려운 욕설도 서슴지 않고 내뱉었다(마태 23,33).
성전이란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엎어버렸고, 율법학자와 바리새파 사람들의 위선에 분노했다. 예수라는 인간성이 드러나는 모습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목사가 항상 분노를 죄악시하며, 해서는 안 될 행위로 생각한 건 아니다. 때론 분노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정작 분노해야 할 상황에 함께 분노하지 못한 책임이 그에게 존재했다.
첫 단락에서 수치심을 언급했는데, 왜 분노를 논하냐고? 목사는 분노한 청년을 두고, 다른 청년이 느낀 수치심을 ‘정신병’으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살아가는 방식을, 타자에게 강요하는 행위가 교회에서 신앙생활이란 이름으로, 은혜라는 명목으로 강요된다.
수치심을 느낀 청년에게 말했다. 네가 경험한 수치심은, 인간이면 누구든지 느끼는 거라고. 다만 과거 행위에 갇혀 현재 느끼는 수치심이란 감정을 부정할 필욘 없다고. ‘왜 나는 지금, 수치심을 느끼는 걸까’ ‘그럴 수도 있지’하며 넘어갈 스스로를 향한 대화가 필요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