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조한 기억모음⑤] [2] 똥 팬티 세탁에 매일 청소까지… 그 모든 게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난과 눈물, 역경으로 만들어진 신화 ‘하나님을 아는 것’ 삶을 더 풍성하게 만드는 신앙… 모든 걸 은혜로 눙쳐서야
2024년 12월 13일

방장에게 노예 생활하던 중 나는 강렬한 신앙 체험을 했다. 내 인생의 각도를 튼 놀라운 사건이었다. 대학교에서는 학기 초 대학부흥회를 연다. 포도나무교회 여주봉 목사를 초청해 세미나를 개최했다. 주제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었다.

나는 기독교인으로 살면서 오랜 시간 삶의 변화를 꿈꾸었다. 좀더 성실하게 살기를 바랬다. 정직하고 경건하기를 바랬다. 언제나 여색(女色)은 발목을 붙잡았고 마음을 괴롭게 했다. 그런데 여 목사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 만큼 그리스도인의 삶이 변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여 목사는 탈출기를 해설하며 하나님조차 자신의 목적과 수단으로 활용하는 자기중심적 인간의 삶을 비판했다. 나는 좌절했다. 이제껏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삶의 액세서리 쯤으로 생각해온 지난 날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깊은 절망과 슬픔이 몰려왔다. 신에게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눈물을 흘렸다. 대강당에서 한참을 울었다. 시규와 대풍이랑 점심을 먹으러 걸어가는 와중에도 펑펑 울었다. 속죄가 이렇게 거대할 줄은 몰랐다.

기숙사는 매일 아침 5시 30분에 기상해 새벽예배를 진행한다. 나는 아침 7시부터 한 시간을 기도하고 1교시 수업을 듣기로 작정했다. 저녁에도 시규와 7시 기도를 하기로 약속했다. 당연했다. 방에 일찍 들어가면 방장을 마주치는 게 싫었기 때문이다. 최대한 아침 일찍 기숙사를 나와 늦게 들어가면 됐다.

그래서 달라진 게 하나 있느냐는 것이다. 누군가 10년이 지난 지금 달라진 게 있느냐고 물으면 나는 확실하게 답할 수 있다. “달라진 게 없다.” 그렇다. 지금도 달라진 게 없었다. 나는 나였다. 신에게까지 내 마음을 투영하는 자세나 신에게조차 죄책감을 느끼는 여린 마음, 신념에 어긋나는 건 아무리 많은 돈을 준다 해도 거절하는 자세와 노을을 바라보며 누구보다 사람 좋아한다는 점도 달라지지 않았다.

기말고사를 준비하던 어느 날 밤. 경건한 마음으로 공부에 임했다.

대학부흥회를 경험해도, 수많은 눈물을 흘려도 나는 달라지지 않았다. 오랜 시간 대학부흥회 시절의 감동을 생각하며 ‘그 시절의 신앙으로 돌아가자’고 부르짖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스운 일이다. 내가 나를 이해하기보다 보이지 않는 신을 이해해야 한다니. 힘겨운 생활은 더욱 신을 붙잡게 했다. 힘든 삶이 정리되고부터 신을 집착하던 태도는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신앙을 정리 했을까. 오히려 신앙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내게 신앙은 현실의 삶을 더욱 풍성하게 살도록 도와주는 힘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게 만드는 능력이다. 가진 것 없어도, 이룬 것 없어도 일말의 희망을 믿는 삶이 내게는 신앙이다. 내 삶이 시궁창 같아도, 시궁창에서 별을 바라보며 사는 삶 속에서 행복을 만들어가는 삶을 깨닫기까지 10여년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그저 똥 팬티나 빨래해주며 신의 섭리라고 합리화하는 것은 은혜가 아니다. 폭력이며 학대다. 교회를 다니면서 내 삶은 달라지기보다 악화 되었다. 설교를 못하는 목사 대신 인터넷에서 떠도는 목사들의 설교를 들으며 신앙의 가치를 짜집기 했다. 그러다 여 목사를 만났고, 머지 않아 무신론 선배를 만나 신학 공부에 눈을 떴다.

그럼에도 새능력교회는 “모든 것이 은혜”라고 말한다. 지금도 그 교회는 외부인과의 성경 공부를 금한다. 지옥에도 갈 수 있다고 협박한다.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 새능력교회를 다니는 것이야 말로 지옥에 갈 수 있는 행동이라고 본다. 성경의 가르침을 믿기보다 목사의 신념을 믿는 곳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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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접 때 잘 봤어. 그 새끼 싸가지 없더라. 그럴 거면 뭐 하러 면접관 타이틀 달고 앉아 있었대? 지 할 일이나 할 것이지. 잘 됐어. 그런 회사 가봐야 별 의미 없었을 거야. 마지막까지 예의를 갖추고 “회사의 번영을 기원합니다” 인사했던 거, 잘 했어. 너도 잠시 면접관 노릇 좀 해봐서 알 거야. 무얼 질문해야 할지를 모르는 인간은 면접에 참여할 자격조차 없다는 사실 말이야. 뭘 물어봐야 하는지도 모르는데 무슨 면접을 보라는 거야. 그렇지? 처음 떨리는 마음, 직접 손으로 공고를 올리던 긴장된 너의 숨결, 너의 손길, 기억할 거야. 무엇부터 물어봐야 할지, 떠오르는 질문들을 쏟아내고 ‘이건 물어봐야 해’ ‘이건 묻지 말아야 해’ 고민하던 순간들. 밀려오는 면접자를 대하던 너의 숙고를 생각하면 그날 그 회사의 면접은 이미 꽝이야. 기억나니. ‘이 분은 이 회사에 적합하지 않아’라고 생각했던 사람들 말이야. 능력은 출중한데 이런 험한 데 와서 고생하지 않았으면 했을 지원자들 말이야. 마음속으로 ‘지원자들 모셔두고 배워보자’고 생각나게 만든 능력자들 말이야. 네가 떨어진 이유도 똑같아. 능력이 출중하니까, 머리 잘 굴러가니까, 금방 뛰쳐나갈 거란 것도 알았을 거야. 그러니 공고에도 없는 ‘행사 보조’ ‘전화 응대’ 같은 단어로 에둘러 지껄였겠지. 그것도 면접장에서. 그래서 그 놈 회사는 꽝이라는 거야. 난 말야. 회사 선임에게 된통 당하며 혹독하게 살아왔던 그 분이 가장 기억에 남더라. 동변상련이라 해야 할까. 규모가 있는 회사일 수록 분업화가 잘 돼 있잖아. 전문적일수록 디테일함에 몸서리치기도 했고. 오자(誤字) 하나에 광분하는 선임을 보면 볼수록 때론 두려움을, 때론 자책이 들기도 했겠지. 그렇지만 그 혹독한 시간들을 보냈기에 지금의 섬세한 네가 다듬어졌잖아. 그렇게 하나 둘, 성장하는 거겠지. 그분의 눈망울에는 아직도 그 선임이 존경하는 자리에 서 있는 걸 느꼈어. 섬세하고 예리하다 못해 예민해서 갈구고 또 갈구는, 그러나 그 손길이 없었다면 결코 몸에 익힐 수 없었던 실무 경험 말이야. 그런 회사를 가야 하는 거 아니겠니. 일하면서 빼먹을 게 있는 곳, 혼은 나지만 존경심이 드는 곳, 지치지만 배울 수 있는 곳. 무력감이 아니라 성장통을 느낄 수 있는 곳. 하긴, 그런 회사가 아니라서 귀한 시간 내 가지고 온 면접자에게 그따위 질문이나 던지는 거겠지. ‘한 놈만 걸려라’ 심보로 말이야. 가운데 앉아 가지고 좌장처럼 보이고는 싶었는지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공고에도 없는) 이 일들, 감당할 수 있겠냐”고 묻는 놈 밑에서 뭘 배우겠니. 갈 데 없는 건 똑같은 처지에다, 나이만 열 다섯살 더 많아 이직은 꿈도 꾸지 못할 텐데. 나이 좀 많다고 깝죽대는 게 전부인 놈이 말이야. 잘 됐어. 어차피 됐어도 안 갔을 거잖아. 주제도 모르고 콧대만 높은 것들, 넘치는 노동 인구의 수혜를 받는 한심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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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를 만든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 네가 만들려던 그 잡지 말이야. 솔직히 말해서 포기하길 잘했어. 원래 잡지를 만든다는 건 혼자서 할 수 있는 업무가 아니야. 유명한 잡지들을 봐. 그 잡지 한 호를 만들기 위해 매달리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니더라. 사진 보정과 편집조차 익숙하지 않은 네가 잡지를 만든다는 건 어쩌면 욕심이 아닐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뭔가를 말하고는 싶은데, 말할 방법이 없어서 편집 디자인에 기대는 너의 부푼 마음 말이야. 나도 그게 뭔지는 알 거 같아.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란 생각이 들어. 잡지를 만드는 일은 단순히 보기에 좋아 보이는 것 정도는 아니야. 어떤 내용을 담아야 하는지를 기획해야 하고, 어떤 제목으로 독자들을 후킹 할 수 있는지, 사진은 또 저렴한 스마트폰이 아닌 미러리스 같은 전문 카메라로 찍어야 하는 고급 기술이야. 글자를 조제(調劑) 하는 일도 그래. 하고 싶은 말을 나열한다고 될 일이 아니라는 거지. 고등학교 1학년 때 기억해? 담임 선생님이 써오라던 독후감, 일부러 단락도 구분하지 않은 채 3000자, 5000자 한 무더기로 써 냈던 거. 마음이 고운 선생님이라서 그랬지, 나였으면 가차 없이 다시 쓰라며 까버렸을 거야. 선생님이 홀로 자리에 앉아 네가 쓴 그 거대한 문장들을 다섯, 여섯 줄로 요약하느라 진땀 뺀 모습도 기억할 거야. 그땐 챗지피티(chatGPT)도 없던 시절인데 말이야. 선생님이 고생 좀 하셨지. 이제 사람들은 손바닥만 한 글을 겨우 읽는 시대에 살고 있어. 손바닥이 뭐니, 손톱만 한 글도 읽지 않는 논 텍스트(non-text) 시대야. 그러나 글과 문장이 필요 없어졌다는 건 아니야. 왜냐하면 인간은 글과 문장으로 의사를 소통하기 때문이야. 글을 읽으려 하지 않는 시대에, 오히려 글을 정제된 손길로 다듬고 또 다듬는 강인함이 필요하다는 걸 나는 말하고 싶어. 네가 듣기에 참 미안한 말이지만, 앞으로도 네가 만들려던 지면신문 오래도록 실패할 거야. 그러나 포기하지는 말아 줘. 그 신문이 너의 멱살을 잡고 삶의 자리를 이끌어갈 테니까. 너의 그 신문에 사람들이 호응하지 않더라도 신문을 만들어 글을 다듬고 다듬는 일에는 지치지 말아 줘. 미래의 내가 과거의 네 글을 보면서 살아갈 힘을 얻을 테니 말이야. 지금의 난 두 학생의 서로 다른 갈림길을 관찰하고 있어. 두 녀석을 보니 네가 떠오르더라. 신념에 가득한 딱딱한 문체, 옳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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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day소랑 2026년 6월 21일 일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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