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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완료/신학; 신앙

[다시 쓰는 은혜사] <1> 베레모도 벗은 채, 교회를 나오다

입력 : 2018. 08. 27 | 수정 : 2018. 08. 28 | A21

 

다시 쓰는 恩惠史, 교회편: 나는 어디로 가나 <1>

 

13년. 자그마치 13년이란 시간의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2003년 부활절부터 여태껏 달려왔으니 아쉬울 법도 하다. 베레모도 쓰지 않고 방송실을 나왔으니. 뒤도 돌아보지 않은 데에는 후련함이 맴돌았다.

 

그렇다. 가나안 신자가 되었다. 이제 어떻게 먹고 살 건가. 무엇을 하며 지낼까. 만감이 교차했다. 교회에서 살아야 할 운명이기 때문이다.

 

더는 담임목사(담목) 신앙에 공감을 표하기 어려웠다. 어쩌겠나. 신학생은 담목 입에서 선포되는 말이 하느님 말씀이어야 하는 걸.

 

삶이 되어버린 나만의 신앙 하나 붙잡고 여기까지 꾸역꾸역 버텨온 결과였다. 유감스럽게도 내 신앙이 사람을 살릴 수 있으리라 믿었다. 정말로.

 

전투복에 베레모도 쓰지 않은 채 나온 교회는 한국 어디보다 성서적임을 자임한 교단의 교회다. 여느 교회보다 기도와 예배 ‘생활’(이 표현이 중요하다!)을 강조했다. ‘부르짖는 기도’, ‘두 손 번쩍! 들고’ ‘주여 삼창!’을 귀에 박히도록 들었으니 매년 여름, 수련회로 바빠졌고 금요철야예배 땐 목이 쉬고 말았다.

 

주여삼창

통성 기도 시 “주여!”를 세 번 외치는 행위다. 성서에 근거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다니엘 9:19을 인용하지만 복음서 예수는 은밀한 중 계신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했다(마태 6:6).

 

월요일서부터 금요일 오전─오후는 학부 생활. 금요일은 철야예배, 토요일 점심은 전도, 저녁은 학생예배. 주일은 아침 9시에서 오후 3시까지 예배. 곧장 터미널로 달려가 기숙사로 향했으니, 버스가 침대이며, 안락한 요람이었다.

 

전도사였던 건 아니다. 일반 청…. 아니, 신학생 청년으로 고작 2년을 지냈다(이 힘든 생활을 10년이나 생활한 분도 계신 마당에).

 

신학생 청년에게 한 달에 한 번 내지 두 번 주어지는 5만 원 권 한 두 장과 어머니 용돈으로 넉넉히 살아냈다.

 

경제관념이 없던 그 시절, 교회 일은 전혀 힘들지 않았다. 방송실에서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포토샵으로 프레젠테이션 손보는 작업이 그립기도 하다.

 

지금은 아니지만 왼손에 커피, 오른손엔 조선일보면 충분했기에. 교회서 생활을 영위하면 영위할수록 교회를 벗어나고 싶었다.

 

더듬어보면 교회를 고민해 본적이 많지 않았다. 일이 바빴기 때문은 아니다. 공동체를 향한 판단과 느껴지는 감각을 보류했을 뿐이다. 그간 시스템과 작업, 노동은 숱하게 논의해왔지만 정작 공동체 속 그을린 자아를 보지 못했다.

 

침묵을 깨고 하느님이 잘했다, 못했다 평가하면 좋으련만. 교회와 복음서 예수는 서로 달랐다.

 

문제는 맹목적 신앙이었다. 담목 경험에 근거한 신앙이 정답일까 의문을 품었다. 그리고 열어젖힌 방송실 문. 한치 앞도 보이잖은 문을 열고 사회로 나올 때까지 걸린 시간 13년.

 

말 없는 십자가/침묵이 지시하는 바가 무엇인지 고민했더라면. 이렇게 멀리 오진 않았을지도.

 

“내가 널 그렇게 가르쳤더냐” “내 자신이 한심스럽다”던 도문(導問)을 가끔 곱씹곤 한다. 글을 준비하며 재구성된 담목은 한 단어로 정의되기 어려웠다. 그는 우직한 존재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갈 나무 없다지만 열한 번 찍어도 쓰러지지 않은 존재다.

 

때론 대단해보였다. 피로함 속에도 새벽예배를 위해 동 트기 두 시간 전부터 차량 운행을 나가고, 목청 큰 설교를 한결같이 1시간 떠들어댔으니.

 

거대한 체구, 파워풀한 목소리. 결단한 바, 이뤄내겠다는 열정이 아무래도 교인들에게 리더십이지 않았을까. 우직함을 지탱하던 힘은 신앙에 있었다. 담목에게도 신앙은 삶이었다. 나도 담목도, 삶이 신앙이자 신앙이 삶이었을 테지만 내내 흐르던 일상 속 화이트노이즈는 끝내 파국으로 치달았다.

 

디베랴 바다에 다시금 자신을 내보인 예수(요한 21:1). 함께한 삶을 송두리째 부정한 베드로를 말없이 바라본 예수(누가 22:61). 내게 예수는 현상과 감정에 충실한 성격 급한 존재가 아니었다.

 

하느님이 침묵하고 말았다. 4년 전부터 아무 말도 않고 말을 아끼었다.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교회를 나온 것도 하느님이 인도했다거나 지시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분명한 것은 13년간 그 분의 현존, 뜻, 이름에 댄 오해였고 교회공동체와 담목까지 왜곡한 과거다.

 

나는 가나안 신자다. 지금도 묵언으로 일관하는 하느님을 돌아봐야 할 필요를 느꼈다. 교회를 떠났을 뿐, 사랑하는 당신의 얼굴을 잊지 못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