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7. 03. 01 | 지면 : 2017. 03. 28 | A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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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망이의 평점
가독성: ★★★
내용: ★☆☆
소장가치: ★★☆
보너스점수: ★
평점: 총 7점
평점 기준
가독성
① 펜 없이 눈으로 읽기 쉬움 3점
② 펜으로 줄치면서 읽어야 함 2점
③ 각 장마다 요약을 해야만 이해할 수 있을 경우 1점
④ 각 장마다 요약을 했음에도 어려울 경우 0점
내용
① 독서 후 다른 곳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유용함 3점 (다른 곳에 적용 가능성)
② 단순한 새로운 정보의 습득 2점 (다른 곳에 적용 가능성이 없음)
③ 새로운 정보 없이 기존 정보를 재편집 했을 경우 1점
④ 텍스트 오류 발견 시 0점
소장가치
① 평생을 두고 함께 갈 텍스트 3점
② ①의 경우에는 해당 되지 않지만 지인에게 한번은 추천할 텍스트 2점
③ 도서관에서 빌려볼 만한 책 1점
④ 안 봐도 그만인 텍스트 0점
보너스 점수
저자에 대한 호의감이나 감동 외에 기타 점수 1점
뭐라 평가를 내리기 애매한 본문이었다. 마치 노래 가사(좋아 보이면서도, 좋아 보이지 않는…)처럼 고민을 하게 해주는 본문이었고 장, 단점이 뚜렷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본문에 관한 평가는 아마도 읽는 독자들 사이에서 상이하게 나누어질 듯하다. 이 상이함 속에서 처음에는 ‘어설픈 본문’이라고 평가를 내렸다.
서평을 쓰면서 생각해보니 필자가 가지고 있는 기준 안에서는 적합한 본문이라는 것을 느꼈다. 그간 필자가 읽은 성경통독 본문들 중 좋은 본문을 추천하라고 한다면 ‘통 성경 길라잡이’(조병호 저)와 이 본문 두 권을 추천해 줄 정도다.
◇ 불호(不好): “성경통독 본문도 아니고, 개관 본문도 아니고…”
우선 이 본문이 필자를 처음 고민을 하게 한 부분 성경통독 본문답지 못 했다는 것이다. 통상 성경통독 본문이라면 장르별로 분류된 현재의 정경을 시간적 흐름에 따라 재편집해 독자들에게 설명을 해줘야 하는데 이 본문은 그간 필자가 읽었던 다른 성경통독 본문들(‘성경통독’, ‘통 성경길라잡이’, ‘성경의 맥을 잡아라’, ‘90일 통큰통독’, ‘어 성경이 읽혀지네’)에 비해서 예언서와 서신서의 정리가 많이 미흡했다.
물론 본문 안에 ‘한 눈에 살펴보기’ 항목에서 성서의 흐름을 잡아주고 있다. 하지만 이 부분보다 성서를 개관적으로 설명하는 ‘하나씩 짚어보기’ 항목에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기에(거의 3배 차이가 난다.) 이 본문이 성경의 시간적 흐름을 이야기 해주는 성경통독 본문이기보다 성서의 각 권별 개관을 이야기 해주는 성서 개관서에 가깝다고 느꼈고, 이러한 부분은 필자에게 불호로 다가왔다.
이 본문을 읽는 동안 내용 부분에 있어서 특정한 요약(summary)를 안 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것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성서의 시간적 흐름에 관해서 딱히 정리할 만한 내용이 없었고(기존에 따로 정리해 둔 것이 있기에) 그렇다고 개관을 위주로 요약하기에 필자가 추후 정리할 본문들과 겹치거나 혹은 내용이 부족할 것으로 보여서 이 또한 포기한 것이다.
이런 연유로 처음에는 이 본문에 관해서도 ‘한정된 지면 안에서 성경의 흐름과 개관을 동시에 다루어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고 하다 보니 두 마리 다 제대로 잡지 못 하고 놓쳤다’고 평가를 내렸다. 하지만 조금만 다시 생각을 해보니 의외로 필자가 원하는 기준에 합당한 본문이 아니었나 싶다.
성경통독 본문답지 못하다
다른 본문과 달리 예언서, 서신서의 정리가 미흡했다
‘성서 개관서에 가깝다’고 느끼기도
한정된 지면 안에서 성경의 흐름과 개관을 동시에 다뤄 두 마리의 토끼 놓쳤다
저자의 해석이 최대한 배제 돼
성경통독 본문은 해석의 방법, 성서에 대한 설명이어야
영적인 해석에는 ‘조심해야 한다’ 문구 삽입,
교회에선 증명 됐지만 과학적으로 공신력 없는 고고학적 내용을 설명
성서를 볼 수 있게 만든다
각 날(day)로 마련한 문제, 본문에서 다루지 못한 내용을 다뤄
이는 성도가 본문만을 읽고 끝내는 게 아닌, 성서를 공부할 수 있게 한다
◇ 필자가 원하는 기준: ① 저자의 해석이 최대한 배제되어 있는 본문
본문은 위에서 언급한 단점들이 명백히 보이지만, 본문이 가지고 있는 장점들은 이 본문의 단점을 잘 덮어준다. 이 본문의 가장 큰 장점은 우선 저자의 해석이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았다는 것에 있다. 필자가 성경통독 본문들에 서평을 남길 때마다 쓰는 논평(comment)이 있는데 그것은 ‘성경통독 본문들은 초 신자가 읽는 본문들이기에, 최대한 저자의 성서 해석관이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라는 논평이다.
필자가 속해 있는 개신교는 성도들이 성서에 해석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종교다(물론 그 ‘자유’라는 것은 정통 기독교 교리 안에서 이야기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진정한 개신교의 성경통독 본문은 성서를 해석하는 방법, 혹은 성서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되어 있는 본문이여야지, 특정 저자에 의해 해석된 성서를 보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성서는 단 한 가지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삶의 형태를 이야기 하고 있고, 우리와 내 삶 또한 너무 다양하기에 한 가지 교리를 절대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또한 교리가(특정 저자의 성서 해석관) 성서를 앞선다면 그것은 ‘오직 성경으로’ 구호를 가지고 있는 개신교를 탄생시킨 종교 개혁 정신에도어긋난다.
물론 해석 없는 해설은(설명) 없다. 하지만 동시에 그 강도(強度)나 수위에 있어서는 충분히 조절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여호수아가 아말렉을 진멸한 내용은 성서가 말하는 범주 안에서 오늘날의 언어로 최대한 쉽고 재미있게 그리고 해석이 적게 들어간 설명은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여호수아가 ‘왜’ 아말렉을 진멸했는지에 관한 부분은 성서 자체의 내용이기보다는 해석에 관련된 내용이다. 그렇기에 성경을 해석 할 수 없는 신자들이 주로 보는 본문들은 여호수아가 혹은 하나님이 왜 아말렉을 진멸하라고 시켰는지에 대해 이야기 해주는 본문이 좋은 본문이 아니라, 여호수아가 아말렉을 진멸 시킨 내용을, 신자들이 성서를 볼 때 이해하기 쉽게 만들어주고 나아가 성도들이 직접 성경을 보며 해석의 길로 인도해주는 본문이 좋은 본문이지 않을까.
이런 측면에서 이 본문은 기존 다른 본문들보다 훌륭하다. 저자는 곳곳에 성서학자들이 부딪치는 부분에 대해서 여러 학설을 소개하는 수준으로만 설명을 하며 자신의 해석보다는 성서의 이야기를 서술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특히 구약을 신약으로 해석을 할 때에는 특정 구절을 각주로 달아놓은 동시에 ‘영해(영적인 해석)로 해석을 할 때에는 조심해야 한다’는 문구를 삽입함으로 새 신자들이 주로 실수하는 부분에 있어서 경고의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다. 또한 새 신자들이 오해하거나 혹은 교회에서 증명되었다고 외치지만 실제로 과학적으로 공신력 없는 고고학적인 내용들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 필자가 원하는 기준: ② 성서를 볼 수 있게 만들어주는 본문
또한 각 날(day)별로 마련한 문제는 본문에서 다루지 못했지만 놓치기에 중요한 부분들, 예를 들어 출애굽기 설명 부분에는 유대인의 3대 절기를 설명을 안 하고 있지만 뒤에 문제 부분에서는 이 3대 절기를 찾아서 쓰라고 한다. 성도가 직접 찾아보고 내용을 스스로 정리해볼 수 있게끔 만들어주는 좋은 역할을 하고 있는 듯하다.
물론 창세기 1:1을 원어로 외워서 적어보라는 조금 오버된 부분도 있지만, 그럼에도 성도가 본문만을 읽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이 부분을 통해 성도가 성서를 손에 잡고 공부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점이 이 본문이 가진 두 번째 장점이다.
◇ 날로 먹지 마십시오. 배탈 납니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이 본문을 안 좋게 볼 것 같다. 성서의 흐름에 대해서 제대로 설명하지 않고 성도 스스로가 성서를 보도록 유도만 해주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런 비슷한 종류의 본문 하나만 읽고 성서를 이해하고자 했던 이들에게는 한 없이 부족해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필자는 조금 질책을 하고 싶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서 그 자체에 있지, 이런 본문들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런 본문들을 보는 이유는 성서가 워낙 보기 힘들기 때문이지, 이 본문으로 성서를 대치시키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좋든 싫든 기독교의 기본 베이스는 성서와 그 안에 계시된 삼위일체 하나님이다. 물론 성서는 어렵다(전공자인 필자도 항상 느낀다). 그리고 이에 대한 고민 상담도 필자에게 많이 들어온다. 그럴 때마다 필자는 “어렵다고 성경을 포기할 것인가?”라고 되묻는다.
성서는 분명 우리와 동떨어진 시대를 이야기 하고 있고, 그 간격은 너무 길고, 멀다. 그러나 우리에게 그들이 처했던 박해는 없다. 필자는 각 시대마다 성도가 가져야 할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초대 기독교 시대에는 초대 기독교가 가질 책임이, 중세에는 중세의 책임이 오늘날에는 오늘날의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분명 오늘날은 박해도, 교황의 횡포도 없지만 성서를 이해하는데 너무 멀어져 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오늘날의 성도라면 성도가 가져야 할 책임을 가지고 믿음의 선배들과 같이, 그리고 우리가 믿는 2000년 전 오신 그분과 같이 힘든 현실 가운데서 한 걸음 한 걸음 전진하는 것이 옳은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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