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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완료/신학; 신앙

[그래서 안 된다는 거다] “꿈에서 자매가 나와 사귀게 됐다” 하나님의 뜻으로 오해해서야 되겠나

입력 : 2017. 03. 26 | 지면 : 2017. 03. 28 | A19


그래서 안 된다는 거다<4>


나홀 성 바깥에 있는 우물에서 이삭은 처음으로 리브가를 대면했다. 성서에서 나온 에로스적 사랑의 절정이다. 이보다 아름다운 남성과 여성의 모습을 그린 장면은 없을 것이다. 이 구절이 창세기 24장의 내용이다. 창세기 24장을 묵상하며 “한 자매를 만나고 있는데 하필 창세기 24장을 읽고 있었다. 사귈까 말까 고민을 하다가 그 날 자매가 나오는 꿈을 꿨는데,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여 사귀게 됐다”고 자랑하는 것을 들었다.


   하나님의 뜻이 그 형제처럼 가시적이고 알아듣기 쉬웠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그렇지 않다. 인생은 고달프다. 문제를 안고 살며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고민하고 숙의해야만 한다. 수학 문제처럼 답이 나오는 게 인생이라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음을 성서로 확인하곤 한다.


◇ 간단히 말해, 계시란 ‘하나님의 말씀이자 뜻, 예수 그리스도’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다. 계시란 ‘하나님의 말씀, 뜻’이다(요한계시록 1:1; 에베소서 1:17~18). 또, ‘예수 그리스도’다(로마서 16:25~26). 계시를 이해하기 위해선 계시의 목적을 알아야 한다. 목적은 간단하다. 하나님은 인간의 구원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하셨다는 것이다. 계시의 방법은 성서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이었다.


   도미티아누스(81~96년경) 황제 때 밧모섬에서 사도 요한이 기술했다고 믿는 요한계시록 1:1은 계시록의 내용을 그리스도께서 요한에게 계시로써 알려주었다. 에베소서 1:17엔 지혜와 계시의 영을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됐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이 계시 됐고, 복음은 곧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선포였다.


   로마서 1:19을 보면 자연을 통해 창조주 하나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테다. 루스드라에서 제우스와 헤르메스로 추앙을 받으려 하자 옷을 찢으며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바울은 이방 민족들에게 하나님은 하늘의 비와 철을 따라 열매 맺음을 통해 기쁨을 가득 채워주었음을 설명하고 있다(사도행전 14:16~17). 이처럼 일반계시는 자연이나 역사를 통해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는 것을 말한다.


   반면, 특별계시는 일반계시 안에 포함하고 있지만 믿음과 언어, 가시적인 형태로 띤다. 예를 들면 창조 이후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실과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창세기 2:16)이나 사무엘을 부르는 주님의 음성(사무엘상 3:4), 다니엘과 요셉의 꿈, 에스겔과 스가랴의 환상이 있으며 천사(창세기 16:7~14)와 야곱의 엉덩이뼈를 친 존재(창세기 32:24), 시내산의 영광(출애굽기 24:15~18) 등이 있다.


   특별계시는 성서이며 예수 그리스도다. 분명하게 하나님 자신을 계시한 것이 성서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이다.



계시는 하나님의 말씀

간단히 말해 ‘하나님의 말씀, 뜻, 예수 그리스도’

계시의 방법은 ‘성서’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일반계시, ‘자연, 역사, 이성’을 통해 하나님을 인식

특별계시, ‘믿음과 언어, 가시적인 형태’로 나타나


오늘날에도 특별계시가 필요한가

히 1:1~2, “옛날에는 예언자를 통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말씀.

마지막 날엔 아들을 통해 말씀하셨다”

사이비는 성서를 알레고리적 해석으로 계시를 왜곡

한국 교회 역시 특별계시로 위시해 성서를 해석


우리에게 필요한 건 고단함

대학 선배, “직접 인격적이고 거룩한 삶 살기 싫어하니

기도원에서 ‘떠나가라’ 소리 들으며 만족”

직통계시보다 미워하는 자를 사랑하는 기적이 필요



◇ 오늘날 우리에게 특별계시는 존재하는 것일까?

   특별계시가 주어진 성경 시대의 인물들은 완성되지 못한 계시로 인해 환상을 보았다. 때로는 하나님과 대화하는 풍경이 연출되기도 했다. 하나님은 자신을 성서로, 예수 그리스도로 드러내고 계시했다. 그 완성이 성서이며 예수 그리스도다.


   오늘날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거나 환상을 보는 특별계시가 필요할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히브리서 1:1~2을 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옛날에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여러 번에 걸쳐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으나, 이 마지막 날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아들을 만물의 상속자로 세우셨습니다. 그를 통하여 온 세상을 지으신 것입니다(새번역).”


   따라서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성서를 보며 성서 안에서의 특별계시가 현재에 이뤄질 수 있다. 그 계시는 구원에 관한 것이며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인격적 만남과 믿음을 형성하는 것으로 이뤄져야 한다. 특별계시가 현재에도 이뤄질 수 있다고 해서 직통계시(直通啓示)처럼 성서에도 나오지 않은 새로운 하나님의 뜻을 주장하는 건 코미디다. 성서의 완전성을 무시하는 꼴이기 때문이다.


   특히 사이비들이 그렇게 주장한다. 이단의 교주가 새로운 교리, 복음을 찾았다며 2,000년 고통의 교리들을 비웃기나 하듯 알레고리적 해석으로 성서를 끼워 맞추는 건 한국 교회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사이비보다 덜하겠지만 특별한 체험을 특별계시로 받아들여 성서를 엉뚱하게 해석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과연 자매와 사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이를 계시로 이해해야 할까? 만일 자매와 사귀어서 행복하게 살 수 있다면 다행이겠지만, 모든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으리란 보장이 없다. 그게 계시라고 주장할 수 없는 이유다. 때문에 개인적인 체험을 계시라는 보편적, 일반적인 권위로 위시해선 안 된다. 개인에겐 하나님의 뜻일지 모르겠지만 타인에겐 하나님의 뜻이 아닐 수 있다. 이 점을 기억해야 한다.


   존경하는 오랜 대학 선배는 이렇게 말했다. 기도원에서의 치유 사역을 보며 한국 교회 교인들의 욕심을 보았노라고. “직접 인격적이고 거룩한 삶을 살기 싫어하니 기도원에서 ‘마귀야 떠나가라!’하는 소리를 들으며 만족해한다” 맞다. 어쩌면 우리들은 무언가 자극적인 경험을 통해 구원 받았으며 성화 돼 가고 있음을 입증하려 할지 모른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눈물을 흘리며 병도 고치고 꿈을 꾸며 기적을 통해 직통계시를 받는 게 아니라 당장 미워하고 시기하는 형제를 보고 불쌍히 여길 수 있는 기적이 우리 삶에서 이뤄져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나는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가려다가 우연히 자매와 만나고 있다는 그 형제를 보았다. 자매와 얼마나 가까이 붙어 있던지 보던 내가 야릇해졌다. 이윽고 형제의 입은 자매의 입에 마주쳤고, 뜨거운 사랑을 나누는 걸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