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7. 01. 24 | 지면 : 2017. 01. 24 | A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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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망이의 평점
가독성: ★★★
내용: ★★☆
소장가치: ★★★
보너스점수: ★
평점: 총 9점
평점 기준
가독성
① 펜 없이 눈으로 읽기 쉬움 3점
② 펜으로 줄치면서 읽어야 함 2점
③ 각 장마다 요약을 해야만 이해할 수 있을 경우 1점
④ 각 장마다 요약을 했음에도 어려울 경우 0점
내용
① 독서 후 다른 곳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유용함 3점 (다른 곳에 적용 가능성)
② 단순한 새로운 정보의 습득 2점 (다른 곳에 적용 가능성이 없음)
③ 새로운 정보 없이 기존 정보를 재편집 했을 경우 1점
④ 텍스트 오류 발견 시 0점
소장가치
① 평생을 두고 함께 갈 텍스트 3점
② ①의 경우에는 해당 되지 않지만 지인에게 한번은 추천할 텍스트 2점
③ 도서관에서 빌려볼 만한 책 1점
④ 안 봐도 그만인 텍스트 0점
보너스 점수
저자에 대한 호의감이나 감동 외에 기타 점수 1점
2014년 12월 14일, 개인적으로 잊을 수 없는 날이다.
첫째는 이 날을 전후로 해서 필자의 생일 겸, 대학 동기들과의 졸업 여행, 그리고 마음에 품고 있던 어떤 친구의 생일을 츤데레(ツンデレ)처럼 챙겨 준 추억 많은 날이기 때문이다. 둘째로는 이 날에 여행 도중 막차를 타고 강릉으로 돌아갈 만큼 집안에서 엄청난 가정사가 일어난 날이기도 했다. 셋째로는 이 날에 어느 한 여자 선지자가 전쟁이 일어난다고 예고한 날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날 GOP에서는 단 한 발의 총성도 울리지 않았다. 총성이 울린 곳이 있다면 집안에서 가족 간의 그 동안 쌓아온 앙금의 총성이 울렸을 뿐이었다.
이 여 선지자는 은밀한 곳에서 전쟁이 일어났고 언론이 통제돼 일반 시민들은 그 사실을 모른다며,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그렇게 이 사건은 하나의 해프닝으로 끝날 줄 알았다. 얼마 후, 한 시사 프로그램에서 그녀가 한 예언을(해프닝) 다룬 것이다. 의외였던 것은 누가 봐도 하나의 해프닝으로 끝날 이 사건을 실제로 믿고 다른 곳에 피난을 했던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이 말도 안 되는 해프닝을 진실로 받아들인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잠시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이 사실은 그다지 놀랄만한 일은 아니다. 한국교회는 오랜 시간 동안 성서를 우상시 하면서 제대로 읽지 않는, 혹은 읽는다고 하더라도 과도한 기계적 영감설(성서의 모든 글자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되어 있다고 믿는 것)로 인하여 성서가 말하는 것을 종종 오해하고 ‘무조건 믿고 보자’ 신앙으로 과도한 오해와 행동을 하는 집단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여 선지자를 따라 나선 사람들의 사례는 한국교회 전체 비중으로 봤을 때 극히 일부지만 앞서 말한 성서에 대한 과도한 신뢰와 반비례 되는 성서에 대한 무관심은 한국교회 교인의 일부가 아닌 교인 대다수 일 것이다.
이런 논리를 펼칠 때 마다 꼭 들어오는 반론은 ‘엘리트주의’다. 다시 말해 성서에 관해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것과 달리 성서에 대한 신뢰가 아닌 분석하고 해석하는 것은 일종의 엘리트주의를 부추기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무엇보다 필자 전공이 신학이었기에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이지, 헬조선 일터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필자의 이런 논리는 타인에 대한 입장에 대한 생각이 전혀 없는 것으로 비춰 진다는 것이다.
맞다. 분명 필자의 이러한 논리는 분명 엘리트주의다. 인정하는 바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성서는 비록 그것이 계시라고 할지라도 약 2000년이 지난 문서이고, 확실히 오늘날의 세계관과 다른 세계관 안에서 작성된 문서다. 그렇기에 성서를 볼 때 어느 정도의 배경지식이 필요하고, 이 지식은 찬양예배나 교회가 프로그램에 투자하는 시간의 절반만 투자해도 충분히 얻을 수 있는 지식이기에 무리한 요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여기에 더하여 필자에게 있어서 신학이란 다양한 진영의 신학들을 비교, 분석하는 것이지만 일반 평신도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복음주의 계열에서 개혁주의만 제대로 알라고 한다. 왜냐하면 그것만 알아도(개혁주의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개혁주의는 평생가도 공부 못 할 만큼 양이 많다. 다만 필자가 추구하는 것은 한 가지 신학을 깊게 공부하기 보다는 여러 신학을 넓고 얇게공부하는 스타일이다) 위에서 말한 어느 여 선지자나 혹은 다른 이단 단체에 속지 않고, 성서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 가독성이 좋은 본문
이런 점에서 이 본문은 상당히 괜찮은 본문이라고 생각한다. 곳곳에 번역이 조금 부자연스러운 부분이 존재하지만(특히 학자들의 의견 인용문) 저자의 서술 방식이 성구 1~2절을 강해설교 형식으로 풀어 놓았기 때문에 집중해서만 읽으면 독자들이 무난하게 읽는데 문제가 없을 것이다.
또한 본문의 주제가 ‘주의 재림은 그 시기를 알 수 없다. 감람산 강화에서 나온 대 환난은 예루살렘 파괴를 이야기 하는 것이다.’라는 맥락 안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이것만 숙지하고서 읽으면 대부분 평신도들도 읽는 데 문제가 없을 것이다.
◇ 의구심이 드는 해석 2개- ① 예루살렘의 파괴에 관한 경고와 재림에 관한 경고에 대한 해석
내용은 봤을 때 크게 잘못했다고 뽑을 내용은 없다. 물론 세대주의 진영에서 봤을 때에는 이 해석이 얼토당토않을 것이고, 그들도 그들 나름대로의 논리가 있겠지만(이것을 지지한 사람들은 초대교회에 유명한 터툴리안, 저스틴, 이레니우스 등이 있다) 저자와 세대주의간의 해석 안에서 양자택일을 하라고 한다면 저자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세대주의 해석가들이 본문에 나온 감람산 강화 본문에 대해서 어떻게 해석했는지 구체적으로 알지 못 하지만, 이 본문 하나만을 봤을 때에는 저자의 해석이 조금 더 논리적으로 맞는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저자의 해석은 깔끔하다.
반면, 마음 한편에서는 읽는 내내 계속 의구심이 들었다. 조금만 냉정하게 본문을 바라보면 저자의 해석도 애매하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저자의 말처럼 감람산 강화가 예루살렘의 파괴에 관한 경고와 이후 재림에 관한 경고를 순차적으로 한 것이라면 이 강화는 현재(70년 예루살렘 파괴) - 미래(알 수 없는 시기의 재림)의 순으로 나가야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저자의 해석을 보면 마태복음 24:1~13까지는 현재, 14절은 미래에 관한 예언, 다시 15절부터 29절까지는 현재, 30~31절까지는 미래, 32~35절까지는 미래를 향한 예언의 형태로 바뀌고 있다. 다시 말해 24:1~13까지는 예루살렘 멸망 직전에 있는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를 했다고 하면, 14절에는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박해가 있을 것을 이야기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15~29절의 상황도 마찬가지이다.
저자는 15~29절까지는 예루살렘 박해를 목도에 둔 제자들에게 예언을 한 것이지만 30절은 재림을 맞이하고 기대할(그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성도들에게 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에 관하여 ‘그 때’를 헬라어인 τοτε가 충분히 위와 같은(현재-미래) 해석을 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준다고 하지만 석연치 않는 해석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36절에서 다시 재림에 대한 강화가 이어지기 때문이다.
만약 필자가 말한 부분을 예루살렘 멸망 직전의 제자들에게 하는 성구라면 이 또한 이어지는 36절과 모순이 된다. 그리스도는 저자가 주장하듯이 자신의 재림에 관한 징조와 시기를 이야기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딱히 저자의 해석이 틀렸다고 말 할 수는 없지만 분명 어딘가 석연치 않은 느낌은 존재했다.
그 날, 총성은 울리지 않았다
한 女 선지자 “전쟁 난다” 言
한국교회, 오랜 시간 성서를 우상시 하지 않았는가
성서를 묻는 것, 엘리트주의라 하더라도 필요
가독성이 좋지만 의구심 들어
“예루살렘의 파괴에 대한 경고, 재림에 대한 경고가 순차적이라면 ‘현재-미래’순이어야 하지 않은가”
“대부분의 해석은 문자적이지만 29절은 비유로 해석함 또한 석연찮아”
‘대 환난’과 ‘자각’
“저자, 성서무오설에 근거해 대 환난을 성격으로 설명하지만 성서의 환난을 부각하기 위해 다른 환난을 쉽게 치부하지는 않는가”
“그리스도인에 대한 자각을 일깨워 준 책. 그것은 곧 재림에 대해 준비하는 것”
◇ 의구심이 드는 해석 2개- ② 마태복음 24:29~31에 대한 해석
두 번째 의구심도 위와 비슷하다. 저자는 대부분의 해석은 문자적으로 하면서 29절은 비유로 해석을 한다는 것 또한 석연치 않은 부분 중 하나다. 물론 29절은 예언서인 이사야서에 관한 인용이기 때문에 충분히 비유로 해석이 가능하다고 하지만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30~31절을 보면 29절과 상당 부분 비슷한 신화적인 표현이 나온다. 그렇기에 이 부분만 비유로 해석을 할 필요가 있나 싶다.
하지만 이 또한 문자적으로만 해석을 한다면 예루살렘 멸망 후 예수님은 바로 오셨어야 했을 텐데, 비유적으로 해석을 해서(하늘의 세력의 흔들림=여러 국가들의 흥망성쇠) 저자의 τοτε에 관한 해석은 틀리지 않게 된다. 이 또한 저자의 해석이 오류라고 할 수는 없을 듯하다.
물론 성서의 계시성을 완전히 제거 한 후, 한 종교의 종교문서라는 입장에서 본문을 주해해보면 그나마 가장 오류가 없는 해석이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위 3복음서가 그리스도의 계시가 아닌 후대의 작품이었다는 것과 이 문서를 편집한 사람들은 임박한 종말론을 가지고 있었다는 두 가지 전제조건만 맞으면 가장 깔끔한 해석이 나올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우선 위 3복음서의 원 자료가 되는 한 문서가 있다고 가정 해보자(그게 Q일지, 아니면 Mt일지, Mk일지, Nk일지는 모르지만). 그리고 그 시기는 70년 성전 파괴 바로 직후 일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로마 군인들이 이스라엘 성전을 둘러쌓을 때, 민족적 자긍심을 가지고 열심 당원처럼 싸운 것이 아니라 도망을 가서 목숨을 부지 했다고 가정해보자.
이 상황에서 기독교인들은 두 가지 상황에 답을 해야 했을 것이다. 하나는 그들도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이스라엘의 상징인 예루살렘 성전을 목숨을 걸고 지키지 않는 것에 대한 변증과 또 하나는 그들이 메시아라고 믿는 그리스도는 과연 이 때에 무엇을 했는지에 관한 변증일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인 중 어느 알 수 없는 집단은 이 본문을 쓰면서 위 두 사항에 관해 변증을 했을 것이다.
첫째로 예루살렘 성전을 버리고 도망 간 것은 그리스도의 명령이었다는 것이고, 둘째는 그리스도가 이 상황에 대해서 손 놓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협소한 세계(바울은 세계 끝이 스페인 정도로 생각했다) 안에서 최대한 빠르게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하면, 자신들의 생애에(하지만 그 시기는 알 수 없는 시점) 그리스도가 온다는 임박한 종말론을 선포하는 목적으로 위 본문을 적었다고 하면 필자가 위에서 품은 석연치 않았던 해석이 조금은 더 많이 풀릴 것이다.
하지만 이 해석은 너무 위험하다. 이 해석은 문서설과 마찬가지로 모든 것이 가정에서 시작을 하여, 여러 가정의 고리들로 이어진 해석이고, 또한 성서의 계시성에 대해서 도전을 하는 해석이기에 신앙 안에서 유용성을 찾기 힘든 해석이다.
다만 필자가 이 이야기를 한 것은 초기 기독교의 대들보였던 터툴리안, 저스틴과 같은 사람들이 지금 우리 기준으로 볼 때 오류라고 생각하는 세대주의 해석을 했듯이, 현재 많은 기독교인들이 지지해줄 만한 저자의 해석도 분명 시대가 지난 후에는 오류로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무조건적으로 한 가지 해석에 몰두하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일이다. 앞서 말했듯이 필자는 한국교회가 기본적으로 이 정도의 해석만이라도 잡고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 ‘대 환난’은 ‘크기’일까 ‘성격’일까
저자의 해석에 있어서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ch.10에서 나온 ‘대 환난’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이다.(21절 새번역: 그 때에 환난이 닥칠 것인데, 그런 환난은 세상 처음부터 이제까지 없었으며,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저자는 성서무오설에 근거하여 이 ‘대 환난’은 크기 부분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성격 부분에서 말하는 것이라며 이것은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이 직접적으로 내린 창세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대 환난이라고 해석을 하는데 이것이 마음에 안 든다. 틀려서라고 하기 보다는 표현에 있어서 조금 신중하지 못하기 때문이며 성서에 나온 이 환난을 부각시키기 위해 다른 환난들(2차 대전과 같은 비극적인 사건)을 쉽게 치부해버리기 때문이다.
실제로 본문에서는 예루살렘 때 죽은 사람들이 히로시마 원자폭탄 때 죽은 사람들의 1/10이라고 하며, 환난의 측면을 고려할 때 예루살렘 학살보다 더 큰 환난은 없었다고 하는데 이것이 과연 신학자가 할 말인지 모르겠다. 한 사람이 죽건, 백 사람이 죽건, 만 명이 죽건 죽는 사람과 그리고 그 주변에 있는 사람에게는 그 자체가 ‘대 환난’이 아닌가 싶다. 그렇기에 ‘환난’ 혹은 ‘고통’이라는 부분에 있어서 말을 할 때에는 최대한 조심해서 표현을 해야 할 것이다.
저자는 성서무오설에 근거해서 어떻게든 21절에 대한 강해를 하기 위해 환난을 성격상 차등을 두어서 표현을 한다고 했는데, 이 해석이 맞는 해석이라고 하더라도 표현 방식에 있어서는 조금 아쉬웠다.
◇ 그리스도인에 대한 자각을 일깨워주는 본문
이처럼 마음에 안 드는 부분들이 몇 부분 있지만 나름 괜찮은 본문이었다. 이 본문은 그리스도인에 대한 자각을 다시 한 번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서 항상 깨워서 준비하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 예수의 구속과 부활 그리고 재림을 믿으며 하루하루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렇게 살았을 때 종교를 넘어 새로운 힘들을 구현해 냈다. 하지만 오늘날 필자를 포함한 많은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신앙에서 멀어졌고, 일종의 종교 생활을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런 때에 이 본문은 다시 한 번 그리스도의 재림과 그 재림을 바라보며 하루하루를 감사하고 최선을 다해 사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서 생각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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