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6. 09. 20 | 지면 : 2016. 09. 20 | A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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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망이의 평점
가독성: ★★★☆
내용: ☆☆☆☆
소장가치: ☆☆☆☆
보너스점수: ☆☆☆☆
평점: 총 4점
평점 기준
가독성
① 펜 없이 눈으로 읽기 쉬움 3점
② 펜으로 줄치면서 읽어야 함 2점
③ 각 장마다 요약을 해야만 이해할 수 있을 경우 1점
④ 각 장마다 요약을 했음에도 어려울 경우 0점
내용
① 독서 후 다른 곳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유용함 3점 (다른 곳에 적용 가능성)
② 단순한 새로운 정보의 습득 2점 (다른 곳에 적용 가능성이 없음)
③ 새로운 정보 없이 기존 정보를 재편집 했을 경우 1점
④ 텍스트 오류 발견 시 0점
소장가치
① 평생을 두고 함께 갈 텍스트 3점
② ①의 경우에는 해당 되지 않지만 지인에게 한번 즈음은 추천할 텍스트 2점
③ 도서관에서 빌려볼 만한 책 1점
④ 안 봐도 그만인 텍스트 0점
보너스 점수
저자에 대한 호의감이나 감동 외에 기타 점수 1점
보편속죄론(普遍贖罪論·universalism)
일명 ‘보편구원론’(普遍救援論). 모든 사람의 궁극적인 행복과 구원을 주장하는 이론. 여기에는 이교적인 만인구원론과 기독교 내에서 다뤄지고 있는 만인구원론이 있다. 먼저 이교적인 구원론은, 모든 사람은 나면서 신(神)에 의해 지음받은 자이며 신의 자녀이므로 궁극적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주장이다.
보편속죄론 (교회용어사전 : 교리 및 신앙, 2013. 9. 16, 생명의말씀사)
예정론(豫定論·predestinarianism)
세계와 인간에 관한 일은 모두 전능한 신에 의해 미리 정해져 있고, 인간의 구원도 신의 계획 속에 예정되어 있다는 기독교의 가르침을 말한다.
절대자(God)가 자연, 역사를 창조하고 그것을 지배하고 있다고 하는 종교 이데올로기는 다른 종교에서도 보여지는 것이지만, 특히 기독교에서는 인간의 원죄를 강조하여, 인간은 아무리 노력하여도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구원은 신의 은총에 의해서만 가능하며 인간이 구원되는지 영원한 죄를 받게 되는지는 신의 의지에 의한 것이고, 그 선택은 신에 의해 예정되어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이것은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 신학화되고, 교회의 권위와 결합하여 중세 사회의 사상 지배에 대한 힘을 발휘하였다. 후에 루터, 칼빈 등에 의해 새롭게 해석되었으며 칼빈주의의 교의에서는 특히 중시되고 있다.
예정설 (철학사전, 2009, 중원문화)
솔직히 리포트가 아니었으면 이 책은 손에 들어오지 않았을 듯하다. 내용 부분에 있어서도 그렇지만, 필자 개인이 ‘영성’이라는 이론 혹은 담론에 큰 관심이 없어서다. 그렇다고 ‘영성’이라는 것 자체에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필자에게 있어서 ‘영성’이란 하나의 담론의 대상이 아닌 ‘삶’ 그 자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와 같이 영성에 대한 담론을 펼치는 본문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것일 뿐이다.
◇ 가독성은 좋지만… “내용 중복과 교회에 대한 부분 비중 있지 않아”
이런 선입견 때문에 그런 것일까? 필자 개인에게 있어서 여러 가지 아쉬움이 많이 느껴진 책이었다.
첫째로 가독성은 나쁘지 않았지만, 논문을 엮어서 만든 책이어서 그런지 내용의 중복이 많았다. 그렇기에 굳이 본문을 다 안 읽어도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충분히 알 수 있고, 반대로 본문을 읽는 동안에 중복되는 내용은 독서의 재미를 떨어뜨리는 요소로 자리 잡고 있다.
두 번째로 아쉬운 점은 텍스트가 제목과 달리 ‘교회’에 관한 부분을 비중 있게 다루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책의 제목은 ‘영성과 교회’인데, ‘교회’에 관한 부분은 300쪽 중 50쪽 밖에 안 됐고, 무엇보다 이 담론의 대다수가 현실적인 방안이기 보다 ‘그리스도를 본 받아 교회간의 협력(WCC‧세계교회협의회)을 하자’ 라는 주장이다.
◇ 하나의 관점이 가득한 본문- 1. 보편속죄론으로 영성을 설명하려는 저자
이 외에도 저자가 곳곳에서 인용하는 성서 해석에도 많은 의문이 가지만(예를 들어 ‘루아흐’를 성령으로 해석하는 부분, 마태복음에서 말하는 심령의 가난과 누가복음에서 말하는 가난. 그 자체를 동일하게 여기는 부분 등) 조직 신학자에게 성서 신학론으로 비평하는 것은 올바른 비평이 아니기에 우선 넘어가고자 한다. 그럼에도 조직신학적 관점에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저자의 관점이 너무 한 가지 측면에만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본문을 보면 저자는 ‘보편적 사랑(보편 속죄론)’에만 치우쳐져서 영성이란 담론을 전개하고 마치 이것이 없으면 영성을 전개할 수 없는 것처럼 서술하고 있다. 그렇기에 저자는 칼빈(Calvin)의 ‘제한 속죄론’은 “잘못됐다”고 완강하게 단정을 짓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 하나의 관점이 가득한 본문- 2. 칼빈주의의 제한속죄론도 저자의 표현과 다르지 않아
그렇다면 ‘보편적 사랑’이 아닌 곳에서 ‘영성’이라는 것을 끌어낼 수 없는 것일까? 《복음과 교육 Vol.6(2010)》 ‘존 칼빈의 영성과 영성의 교육과제’라는 논문에서 발제자(김정준)는 칼빈주의(제한 속죄론)안에서 영성을 아래와 같이 소개하고 있다.
‘기독교 강요’에 제시된 신자들의 현세에서의 삶의 태도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의 십자를 지고 따르는 제자도의 모습이다(Ⅲ.7-8). 전적으로 부패한 인간은 하나님의 법을 온전히 따를 수 없다. 그러므로 부패한 인간에게 하나님의 절대적 은혜가 요청되며, 하나님의 약속한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하다.
여러 가지로 아쉬운 책
논문 엮어선지 내용 중복 多
제목과 달리 ‘교회’에 대한
부분, 비중 떨어져
한 가지 뿐인 관점
조직신학자가 성서신학으로 비평하는 것이 적절한가
보편속죄론으로만 설명해
속죄론의 표현, 다르지 않아
제자도의 삶으로 영성 설명
저자가 말하는 보편적 사랑, 칼빈주의 설명과 다르지 않아
칼빈주의의 예정론
예정에 대해 살펴 그 안에서 구원에 대한 확증을 얻고자 하는 것, “비정상적인 일”
이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데, 은혜로 주어진 믿음을 온전히 이룩하기 위하여 인간은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삶, 즉 복음의 법에 순종해야만 한다. 다시 말하면 말씀에 기초한 개혁교회 영성생활의 내용은 경건이며 그 핵심적인 내용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말씀을 따르는 제자도의 삶이다. 이 말은 칼빈(제한속죄론) 역시도 영성의 끝을(저자의 표현대로라면) ‘주님을 닮아가는 삶’으로 본다는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저자가 말하는 영성의 출발인 ‘보편적 사랑’ 역시도 칼빈주의에서 말하는 것과 크게 다름이 없다.
안양대학교 신학연구소 학술지인 ‘신학지평 Vol.14(2001)’의 ‘칼빈 신학에 있어서 예정론과 속죄론의 위치(발제자: 한성기)’라는 논고를 보면 발제자는 칼빈의 예정론과 속죄론의 관계를 아래와 같이 소개하고 있다.
◇ 예정론, 인식 순서로 보아야
우리는 예정론이 지니고 있는 성격에서 볼 때 우리의 시간 관념상 이 교리는 모든 것에 앞서 신학의 앞부분에서 논해져야 할 교리라고 생각할 수가 있다. 그러나 칼빈의 인식 순서에 본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이 우선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무효화시키지 않게 하기 위함이며, 또한 예정의 대상으로서의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예정을 수행하는 대리인으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순서를 분별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칼빈은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오류에 빠지지 않으려고 주의를 했으며 이러한 사실은 ‘기독교강요’에서도 그 위험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지기 위하여 말씀에서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과 하나님을 아버지로서 찾아 구하기 위하여 우리의 신뢰감이 거기 안주해야 한다는 사실도 부정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자들은 하나님의 계획에 대하여 확실한 것을 붙잡으려고 구름 위를 달려가기를 원하지만 이것은 전혀 비정상적인 일이다. 따라서 신앙의 근신으로써 이러한 무모함 제거하여야 하며, 그럼으로써 그의 외형적인 말씀 안에서 하나님이 그의 감춰진 은혜에 대하여서는 충분히 증거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오로지 그 파이프를 통해서야만 우리가 마실 수 있도록 생수가 풍족하게 흘러나온다. 그러므로 이 원천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일이 결코 없어야 한다”
칼빈이 “말씀에서 시작한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은혜의 복음으로부터 시작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칼빈은 여기서도 구원의 확신은 그리스도의 속죄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우리가 예정에 대해 자세히 살피고 따져 그 안에서 구원에 대한 어떤 확증을 얻고자 하는 일은 ‘비정상적인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해 칼빈의 후예들은 그의 신학을 어떻게 전개했는지 몰라도,칼빈 본인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이 하나님의 예정이 먼저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먼저 선행이 된 이후에 예정과 유기(이중예정)가 전개 되고 인간은 이 과정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스스로의 구원을 확정 짓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말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그렇기에 필자가 보기에 저자가 주장하는 영성이나 칼빈이 주장하는 영성이나 크게 다름이 없다. 그럼에도 저자는 보편적 사랑만을 이야기하고 그와 반대되는 견해는 논리적 반박 없이 단순히 “잘못됐다”라고만 단정 짓고 있다.
◇ 영성은 그래도 삶이 아니겠는가
저자의 견해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의 장성한 분량대로 자라는 것이 아닐까 싶다(ch.1). 만약 이것이 맞는다면 더 이상의 담론은 필요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서두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영성은 삶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인간의 삶의 모습은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기 때문에 어느 하나로 단정 짓는 담론은 어리석은 일이 아닐까 싶다.
어찌 보면 진정한 영성(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은 무엇이 틀리고 옳은 것을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다른 타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나와 다름을 인정해주는 것, 그것이 진정한 영성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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