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6. 04. 01 | 지면 : 2016. 04. 01 | A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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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망이의 평점
가독성: ★★★☆
내용: ☆☆☆☆
소장가치: ☆☆☆☆
보너스점수: ☆☆☆☆
평점: 총 4점
평점 기준
가독성
① 펜 없이 눈으로 읽기 쉬움 3점
② 펜으로 줄치면서 읽어야 함 2점
③ 각 장마다 요약을 해야만 이해할 수 있을 경우 1점
④ 각 장마다 요약을 했음에도 어려울 경우 0점
내용
① 독서 후 다른 곳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유용함 3점 (다른 곳에 적용 가능성)
② 단순한 새로운 정보의 습득 2점 (다른 곳에 적용 가능성이 없음)
③ 새로운 정보 없이 기존 정보를 재편집 했을 경우 1점
④ 텍스트 오류 발견 시 0점
소장가치
① 평생을 두고 함께 갈 텍스트 3점
② ①의 경우에는 해당 되지 않지만 지인에게 한번 즈음은 추천할 텍스트 2점
③ 도서관에서 빌려볼 만한 책 1점
④ 안 봐도 그만인 텍스트 0점
보너스 점수
저자에 대한 호의감이나 감동 외에 기타 점수 1점
유형론(類型論·typology Typologie)
경험과학에서 귀납적 방법에 의하여 어떤 유형(type)을 분류(classif ication), 분석하여 본질을 이해하려는 입장. 저서를 서평한 집필자는 성서 해석에 있어 기독론적으로 구약을 계속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전 모델로 보는 입장으로 유형론의 단어를 사용했다.
문자주의(文字主義·literalism)
기독교의 유일한 경전인 성경에는 어떠한 오류도 들어 있지 않다는 신앙적 신념을 특징으로 한다. 즉, 기록된 성경에는 모든 면에서 오류가 전혀 없기 때문에 문자 그대로 진실하며 절대적인 권위를 지닌다. 따라서 문자 그대로 믿고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 통독에 관한 교재를 만들기 위해서 본 텍스트(text·본문)다. 그렇다보니 웬만하면 텍스트의 내용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나중에 다른 텍스트들과 합본 형식으로 합치려고 했다. 하지만 텍스트 내용 자체가 성서에 관한 통시적(通時的)풀이를 서술해 놓았기 보다는 설교에 가까울 정도로 저자의 성서 해석만 가득하였다.
이전에 본 텍스트(통이다 렛츠 통·조병호)인 ‘성경 통독’도 저자의 해석적 색이 너무 강하다고 비평한 적이 있었는데, 이번 텍스트는 그것을 훨씬 더 웃도는 것 같다.
◇ 그럼 저자의 해석적 색채는 어떤 것일까?
한 마디로 요약하면 ‘구약은 신약으로, 신약은 구약으로 해석하자’의 해석적 경향과 문자주의(文字主義)적 해석이다. 이것이 과연 잘못 된 것일까? 결코 아니다. 어떻게 보면 한국교회라는 토대 안에서 지극히 정상적인 해석이라 할 수도 있다(이 논거는 다음에 다루도록 하겠다) 또한 필자도 특정부분에 있어서 근본주의적 성서해석관을 가지고 있으며, 어느 부분에 있어서는 저자처럼 ‘구약은 신약의 눈으로, 신약은 구약의 눈으로’ 해석하는 경향도 있다. 그럼에도 필자가 저자를 비난하는 이유는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저자의 주장 자체가 너무나도 극단적이라는 것이다.
◇ 어디가, 무엇이 극단적인가- ① 극단적 유형론의 해석
위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필자는 창세기의 원시복음이라는 부분은 기독론으로 해석을 하는 것에 큰 이견은 없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후 놋대에 달린 뱀을 보고 살아 난 것과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보고(믿고) 살아난 것과의 연관을 말하는 성서 해석에도 큰 이견이 없으며, 각 복음서와 사도행전, 그리고 히브리서에 인용된 구약의 구절들은 그에 맞게 신약의 관점에서 해석하기도 한다. 이러한 해석을 해석학에서는 유형론(類型論)적 해석이라고 한다. 이 유형론적 해석의 근거는 (제 2)이사야가 작성한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 이시니이다(이사야 45:15)”라는 구절이다.
다시 말해 예언자의 선포 배후에는 야훼 하나님이 ‘스스로 자신을 감추신’ 그 다양한 구속사적 행위들이 거기에 있었다는 것과 그 역사적 행위들은 전적으로 유형론적인 관찰을 통해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모리아 산-골고다(창세기 22장-로마서 8:32; 히브리서 11:19; 야고보서 2:21~34) 유형을 비롯하여 얍복 강변사건(창세기 32장)과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사건 사이의 유비(類比), 요셉을 통한 감추어진 하나님의 구속사 섭리(창세기 45:7; 50:2)와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사건의 감추어진 신비 사이의 유비와 같이 구약의 증언들과 사건들은 신약의 증언들과 사건들과 일치해야 하고 그래야 구약이 신약의 종교인 기독교 안에서 갖는 경전의 권위가 확고해질 수 있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필자는 유형론적 해석에 어느 정도 동의를 한다. 왜냐하면 유대교의 구약성서와 기독교의 구약성서는 그 편집형태가 다르기 때문이다. 유대교의 경우 역대기를 마지막에 배치함으로 다윗왕국에 회복에 초점이 맞춰지지만, 기독교의 경우 말라기를 마지막에 넣음으로 신적인 메시아의 강림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것은 기독교 지도자들이 처음부터 구약을 유대인의 관점이 아닌 기독교의 관점(유형론적)으로 편집 했다는 가능성(!)이 있다고 이야기 해준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분명 기독교 안에서 구약은 어느 정도 유형론적 해석은 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을 한다.
하지만 동시에 유형론적 해석은 한 시대의 산물이기도 하다. 이화여대 교수인 이경숙 교수는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의 연속과 단절”이라는 논고에서 유형론적인 해석이 발생된 원인을 초기 영지주의에서 찾고 있다. 그녀는 논고에서 “구약의 하나님을 열등한 하나님으로 바라보는 영지주의가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구약의 하나님은 보복의 하나님이고 신약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며, 구약의 하나님은 열등한 신, 신약의 하나님은 최고의 신이라는 이분법적 개념을 사용하며 구약을 배격하기 시작하였다.
정통 기독교인들은 이들에 이러한 공격을 변증하기 위하여 ‘알레고리(allegory)’해석을 도입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할례는 도덕적 할례를 의미하고 정결 의식은 실제로는 세례를 의미한다. 음식에 관한 법도 음식에 관한 것이 아니며 영적인 눈으로 봤을 때 그 진정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고 하였다. 동시에 그들은 유대인들은 율법을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마음이 강퍅하고 육체적이고 둔한 사람들이었기에, 로마인이 아닌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죽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때부터 반(反)유대주의적 해석과 구약에 대한 알레고리적 해석이 일어난 것이다”며 유형론적 해석의 발생과정을 이야기 하고 있다.
이처럼 유형론적 해석은 어떤 관점에 따라 봤을 때 계시를 바라보는 방법일 수도 있지만 또 어떤 관점에서 볼 때에는 하나의 역사적 산물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해석자는 최대한 객관성을 가지고 유형론적 관점과 구약을 구약 자체로 보는 관점을 동시에 가져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최종 견해이고 아마 신학을 전공한 대부분의 학자들도 이와 비슷한 의견을 피력할 거 같다. 그러나 저자는 이러한 객관성을 무시한 채, 위에서와 같이 극단적인 유형론 관점에서 성서를 해석하고 있다. 저자의 해석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모세가 홍해를 건넌 후 마라의 쓴물을 단물로 변화시킨 것처럼, 요단강을 가른 엘리사의 첫 이적은 생명의 근원인 물을 깨끗하게 정화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첫 이적,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사건의 공통점은 모두 물의 변화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가 마실 수 있는 생명수를 공급하는 것이며, 평범한 물에서 주님의 피(포도주)로 바꾸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물이 포도주로, 무기물질에서 유기물질로 바뀝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 사람이 됩니다.(고린도후서 5:17)”
저자는 모세의 홍해, 마라의 쓴 물, 엘리사의 첫 이적을 하나로 묶었지만 이것은 굳이 묶일 필요가 없는(정확히 말해서 묶을 수 없는) 이적들이다. 출애굽기에 나오는 마라의 쓴 물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평과 불순종을 이야기하기 위해서이지, 생명의 물에 관해서 이야기 하는 것은 아니다. 열왕기하에 나오는 엘리사가 물을 깨끗하게 한 기적 역시도 곰이 아이들을 찢어 죽인 이야기와 같이 붙어서 서술 되고 있는데, 이는 그 이전에 있던 엘리야 승천 이후 엘리사에게 선지자로서의 권능과 능력이 생김을 이야기 해주고 있는 것이지, 생명의 물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물론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가나의 혼인잔치의 경우에는 이야기는 위와 또 다르다. 요한복음의 비유는 저자의 말처럼 ‘물→포도주’의 관계와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한 칭의에 관계를 이끄는 해석은 가능은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요한복음 기자의 언어 자체가 상징성이 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이 해석도 여러 해석 중에 하나이지, 절대적으로 맞는 해석이 될 수 없다. 저자는 자신의 해석의 오류 가능성을 계산하지 않은 채 절대적 확신을 가진 어투로 글을 서술해 나가고 있다.
극단적 유형론의 해석
“유형론적 해석, 필요하지만 한 시대의 산물이기도 해”
“유형론적인 해석 발생 원인을 초기 영지주의에서 찾아”
극단적 문자주의의 해석
“가인의 심리학적 공포로 당시 아담·하와·가인·아벨만 존재. 이는 추론에 불과”
“다른 가능성은 배제하고 문자적으로 보는 것, 성서 해석의 오류를 만드는 요인”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식 해석
“저자, 신정론·재물론·교회론·방언론 등 서술하며 신학적 견해 피력. 하지만 신학계에서 환영받지 못하거나 죽은 견해들 많아”
벨런스가 파괴 된 책
“내용 중 구약의 3분의 1이 창세기와 출애굽기. 신약은 절반이 마태복음에 국한된 예수의 공생애를 言”
“오바댜·요나·나훔은 내용에 나오지도 못해 균형 無”
완벽한 신학사상은 없지만
“물론 신학의 다양성은 존중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이 책에 가혹한 평가를 내리는 이유는 성경 통독이 주제임에도 불필요한 글이 많다”
“새신자 위한 성서 흐름·자신의 해석 색채 배제·성도 스스로가 성서를 볼 수 있도록하는 것이 평가 기준이라면 하나에도 못 미치는 책”
◇ 어디가, 무엇이 극단적인가- ② 극단적 문자주의의 해석
또한 과도한 문자주의적 성서 해석관도 성서에 관해 일정 부분 왜곡 할 수 있게 만든다. 저자는 가인이 살해 한 뒤 다른 이들이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고 선처를 구하는 구절을(창세기 4:13~14) 가인이 느끼는 심리학적 공포라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 당시에 아담, 하와, 가인, 아벨 네 사람만 존재했는데 그 중 아벨은 죽고 아무도 가인을 죽일 수가 없었다는 것이 저자의 논리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위 구절에서 가인이 공포를 느낀 존재는 심리학적 위협이 아니라 아담과 하와에 다른 형제라는 것에 의견을 모으고 있다. 물론 학자들의 이러한 견해도 추론에 불과하다. 하지만 성경에 안 나왔으니 무조건 다른 가능성은 배제하고 문자적으로 본다는 거 자체는 성서에 관한 상당한 오류를 만드는 요인 중 하나이다.
만약 성서에 나온 모든 걸 문자 그대로 신봉을 한다면 우리는 회교들과 같이 성서를 번역해서도 안 되며(번역 중에 그 뜻이 왜곡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최소한 사복음서 중 세 복음서는 잘못된 복음서가 될 것이고, 또한 오늘날 모든 그리스도인은 어떤 독을 마셔도 해를 입지 않아야 하고, 또 우리는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가련한(?) 운명이 될 것이다.
◇ 어디가, 무엇이 극단적인가- ③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해석
아울러 저자는 신학전공자도 아니면서 텍스트 곳곳에 ‘영성탐구’라는 칼럼에 ‘신정론’, ‘재물론’, ‘교회론’, ‘방언론’ 등을 저술하며 자신의 신학적 견해를 말하고 있다. 저자의 대부분의 견해는 현재 신학계에서도 큰 환영을 받지 못하거나 사장된 견해들이 많다.
신정론(神正論·theodicy) 부분에서는 하나님이 악을 허락한 이유가 ‘악을 체험해야만 악을 알 수 있기 때문에 악을 허락하신 하나님’ 이라는 전근대적인 신정론을 이야기 하고 있으며, 재물론에서도 ‘헌금을 많이 할수록 자신 안에 이기성이 빠져 나간다’는 말도 안 되는 이론을 펼치고 있으며, 교회론에서는 ‘교회를 떠나는 것이 축복의 원천에서 떨어져 나간다’고 하기도 하고 아직도 논쟁중인 방언의 유무에 대해 생각하지도 않고 극단적 은사주의자들이 말하는, ‘모두가 방언을 받을 수 있다’고 서술 하고 있다.
또한 ‘젊은 지구론’과 여리고의 무너진 연대를 과학적으로 설명하려 하는데, 젊은 지구론은 구약성서학자들과 창조과학자들에게도 많은 부분 외면을 받고 있으며 여리고의 무너진 연대를 여호수아의 연대로 잡는 것 역시, 고고학계에서는 지지를 거의 못 받고 있는 형편이다. 저자는 이러한 형편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소수의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을 마치 많은 과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이야기 하고 있다.
여기에 더하여 천지 창조 때 말씀이신 아들 하나님은 창조의 주역이고, 그 주역을 감독하신 성부 하나님, 그리고 아들을 도운 성령 하나님을 말하는데 위와 같은 주장은 자칫 고대 이단사상이었던 양태론(樣態論)으로 비춰질 수도 있으며, 또 어느 곳에서는 성령을 에너지라고 표현하는 말도 안 되는 신학적 논제를 펼치고 있다. 아울러 사람이 죄를 짓는 것은 악한 영이 그 안을 지배한다는 것 또한 고대 이단 사상이었던 마니교(摩尼敎)의 가르침인데 저자는 이런 마니교의 가르침을 아무렇지도 않게 서술하고 있다.
◇ 어디가, 무엇이 극단적인가- ④ 쓸 때 없는 것을 설명하다 보니 결국 밸런스가 파괴되었다
이러한 이야기들의 나열은 텍스트 내에 밸런스 파괴로 이어지게 되었다. 텍스트는 구약의 1/3이 창세기와 출애굽기 내용이고, 신약의 경우 50%가 넘는 내용이 마태복음에만 국한된 예수님의 공생애를 이야기하고 있다. 이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신약·구약·서신서에 관한 내용, 그 시대적 배경은 거의 한 두 페이지, 심지어 오바댜, 요나, 나훔은 텍스트에 나오지도 못 하였고, 결국 텍스트는 성서를 균형 있게 설명해주는 것이 아니라 특정 저자가 가진 한 가지 관점의 끊임없는 나열이 되어버렸다.
◇ 완벽한 신학사상은 없다지만…
성경통독 텍스트들이 갖춰야 할 자세, 그리고 그 자세와 거리가 먼 ‘성경의 맥을 잡아라’. 물론 각 개인의 신학의 다양성은 존중 되어야 하고, 그 누구도 완벽한 신학적 사조를 품은 이는 없다.
다만 필자가 이 텍스트의 가혹한 평가를 내리는 것은, 성경의 맥을 잡고 통독을 해야 하는 텍스트에 불필요한(심지어 올바르지 못한) 글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식견이 짧아서 올바로 보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필자 개인에게 있어서 성경통독 텍스트가 갖춰야 할 가장 기본적인 것은 세 가지로 압축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예상독자들인 새 신자들을 위하여 성서의 흐름을 잘 이야기 해주어야 한다. ㉡첫째 사항을 이야기 할 때 저자 자신의 해석적인 색채는 최대한 배제하고 이야기를 진행해야 한다. ㉢첫째와 둘째가 지켜진 가운데 성도 스스로가 성서를 볼 수 있게(조금 더 나아가 해석까지도) 기본 지식을 알려주는 텍스트가 좋은 성경통독 텍스트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텍스트는 필자의 기준에 단 하나에도 못 미친 텍스트였다.
성서의 흐름을 설명해주는 건 텍스트 밸런스 파괴로 인해 깨졌고, 저자의 해석의 색채는 그 어느 성경통독 텍스트보다 강하였으며, 텍스트를 본 독자들에게는 올바른(최대한 오류가 없는) 성서 해석을 하기 힘들게 하는 텍스트라고 생각한다. 판매량만 놓고 본다면(네이버 책 분과에서 ‘성경’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검색을 한 뒤, 판매량 오름차순으로 보면 이 텍스트는 1페이지에 링크 돼 있는 책이다) 훌륭한 텍스트일지 몰라도 필자에게는 한 없이 부족한 텍스트이다.
'연재완료 > 신학; 신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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