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9. 08. 05 | 수정 : 2019. 08. 06 | A29
교회가 세습을 해도, 성폭행을 해도, 노동 착취를 일삼아도 어쩔 수 없는 대물림이자 연인 관계였고, 자발적 활동이라 변명하면 그만이라 생각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 기가 막힌 변명의 시대에 살고 있음에도 문제제기와 공론의 장으로 끌고 나오기 힘든 까닭에는 각자도생(各自圖生) 속 대한민국을 헤매기 때문이다. 예수는 권력자와 손잡지 않았다. 예수 자체가 권력을 지닌 하느님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권력을 지닌 스스로 광채로 빛난 존재로 권력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샘물이자 근원인 로고스(Logos) 그리스도는 속에서 영생에 이르게 하는 샘물이 되어(요한 4:14) 나약한 인간에게 흐를 수 있는 존재건만. 신앙하는 이들부터 스스로의 권력으로 드러난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스스로가 권력자가 되어 힘없고 연약한 이들을 예수와 멀어지게 만들다니. 힘없는 사람들은 거리로 내 몰리고 “내가 왜 세상에 내버려진 채 영문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귀찮은 존재가 됐는지” 묻는다. 이마저도 힘없는 사람들은 거리에 조차 나오지 않은 채 심연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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