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음] ‘젠틀하고 구수한 어머니’ 반세기 배우 김수미 별세

2024년 12월 30일

피로누적으로 건강악화를 우려해 활동을 잠정 중단한 배우 김수미(본명 김영옥)씨가 향년 75세로 세상을 떠났다.(2024.10.25) 서울 서초경찰서는 고인이 25일 서초구 방배동 자택에서 심정지 상태로 발견돼 오전 8시께 119구조대에 의해 서울성모병원으로 이송됐지만 사망 판정을 받았다고 밝혔다.

고인은 1970년 MBC 공채 3기 탤런트로 합격해 ‘전원일기’에서 22년간 일용 엄니 역을 맡았다. 코믹하면서 거침없는 말투와 푸근한 연기로 호평 받았다. 1990년대 생에게는 욕쟁이 할머니로도 알려져 있다. 2015년 전국 욕쟁이들이 모여 욕 배틀을 펼치는 영화 ‘헬머니’ 단독 주연을 맡았다.

뛰어난 요리 솜씨도 주목을 받았다. ‘수미네 반찬’(tvN) ‘밥은 먹고 다니냐?’(SBS플러스) 등 음식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 구수한 손맛을 펼쳤다. 유족으로는 배우자 정창규씨와 딸 정주리씨, 아들 정명호씨, 배우로 활동하는 며느리 서효림씨가 있다. 빈소는 한양대병원에 마련됐다. 발인은 27일 오전 11시다.


김민기 “나는 뒷것이야, 너희는 앞것이고.” 싱어송라이터이자 뮤지컬 연출가, 극단 학전 대표, 민주화 운동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 재학 중 ‘도비두’를 결성해 노래 활동을 시작, 재동초등학교 동창 양희은을 만나며 ‘아침 이슬’을 주었고 1971년에 발표했다. 1991년 대학로에 학전 소극장을 열었고 김광석, 들국화, 시인과 촌장, 장필순, 강산에, 윤도현 등 수많은 뮤지션들이 학전에서 성장할 수 있었다. ‘김민기 1집’을 끝으로 가수 생활을 은퇴하고 뮤지컬에 온몸을 바친다. 코로나19 이후 학전의 경제적 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끝내 2024년 3월 15일 폐관한다. 어린이극을 좀 더 손보고 싶다는 일념으로 항암치료를 이어갔지만 끝내 2024년 7월 21일 세상을 떠났다. 향년 73세

신경림 시인이자 문학인. 1956년 등단해 ‘낮달’ ‘갈대’ ‘석상’ 등의 시를 발표했다. 이후 시학 해설지 ‘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로 한국 현대시를 대표하는 시인들을 소개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1973년 만해문학상 1981년 한국문학작가상을 수상해 동국대학교 석좌교수로 부임했다. 2024년 5월 22일. 향년 89세. 발인은 25일 오전 5시 30분

우형철 인터넷 강사. 입시업계의 자사 홍보와 경쟁사의 댓글 조작이 발생한다고 공개적으로 밝히며 ‘클린인강협의회’를 결성했다. 2020년 돌연 뇌출혈로 쓰러져 투병생활을 이어오다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눈을 감았다. 2024년 5월 13일. 향년 59세. 발인은 15일 오전 6시

이상득 전 국회부의장, 제13·14·15· 16·17·18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1961년 한국나이롱에 입사해 상무이사와 영업본부장, 부사장을 거쳐 1984년 코오롱 상사 사장에 올랐다. 1988년 13대 국회의원에 당선돼 18대까지 연이어 국회의원을 지냈으며 한나라당 사무총장을 거쳐 17대 국회 후반기 국회부의장을 역임했다. 2024년 10월 23일. 향년 89세

이요나 탈동성애 운동을 이끈 목사. 43세 이전까지는 동성애자로 살아왔으며 동성애 성향을 버렸다고 주장하며 한국 교회를 기반으로 동성애 성향을 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초등학교 4학년 무렵 동성애를 느끼기 시작했다고 주장했으며 서울 이태원에서 호스트바 ‘젊은 태양’을 시작으로 한국 최초 트랜스젠더 클럽 ‘열애’ 등을 운영하며 ‘리애(李愛)마마’라는 별명의 유흥 사업가로 활약했다. 88올림픽 이후 유흥업소 단속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조용기 목사가 세운 아시아교회성장연수원(ACGI)에 입학해 성령 체험을 경험하며 동성애에서 벗어났다고 한다. 2024년 7월 30일. 향년 76세

장기표 영원한 재야(在野). 정치인, 사회단체활동가. 1970년 11월 노동운동가 전태일의 분신 소식을 접하고 서울대학교 학생장을 치르겠다고 가족에게 제의했다. 이후 노동운동에 지속적인 관심을 쏟았다. 유신체제와 군부독재에 저항하는 민주화운동을 계속해 1971년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을 시작으로 다섯 차례 복역했다. 재야 민주화운동과 노동 운동으로 오랜 기간 헌신했으며 진보정당을 결성하면서 정계에 입문, 정치인과 시민운동가의 삶을 걸었다. 2024년 9월 22일. 향년 78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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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쏘, 할 말 있어④] 뭘 물어봐야 하는지도 모르는 회사, 영포티에게서 “도망쳐!”

면접 때 잘 봤어. 그 새끼 싸가지 없더라. 그럴 거면 뭐 하러 면접관 타이틀 달고 앉아 있었대? 지 할 일이나 할 것이지. 잘 됐어. 그런 회사 가봐야 별 의미 없었을 거야. 마지막까지 예의를 갖추고 “회사의 번영을 기원합니다” 인사했던 거, 잘 했어. 너도 잠시 면접관 노릇 좀 해봐서 알 거야. 무얼 질문해야 할지를 모르는 인간은 면접에 참여할 자격조차 없다는 사실 말이야. 뭘 물어봐야 하는지도 모르는데 무슨 면접을 보라는 거야. 그렇지? 처음 떨리는 마음, 직접 손으로 공고를 올리던 긴장된 너의 숨결, 너의 손길, 기억할 거야. 무엇부터 물어봐야 할지, 떠오르는 질문들을 쏟아내고 ‘이건 물어봐야 해’ ‘이건 묻지 말아야 해’ 고민하던 순간들. 밀려오는 면접자를 대하던 너의 숙고를 생각하면 그날 그 회사의 면접은 이미 꽝이야. 기억나니. ‘이 분은 이 회사에 적합하지 않아’라고 생각했던 사람들 말이야. 능력은 출중한데 이런 험한 데 와서 고생하지 않았으면 했을 지원자들 말이야. 마음속으로 ‘지원자들 모셔두고 배워보자’고 생각나게 만든 능력자들 말이야. 네가 떨어진 이유도 똑같아. 능력이 출중하니까, 머리 잘 굴러가니까, 금방 뛰쳐나갈 거란 것도 알았을 거야. 그러니 공고에도 없는 ‘행사 보조’ ‘전화 응대’ 같은 단어로 에둘러 지껄였겠지. 그것도 면접장에서. 그래서 그 놈 회사는 꽝이라는 거야. 난 말야. 회사 선임에게 된통 당하며 혹독하게 살아왔던 그 분이 가장 기억에 남더라. 동변상련이라 해야 할까. 규모가 있는 회사일 수록 분업화가 잘 돼 있잖아. 전문적일수록 디테일함에 몸서리치기도 했고. 오자(誤字) 하나에 광분하는 선임을 보면 볼수록 때론 두려움을, 때론 자책이 들기도 했겠지. 그렇지만 그 혹독한 시간들을 보냈기에 지금의 섬세한 네가 다듬어졌잖아. 그렇게 하나 둘, 성장하는 거겠지. 그분의 눈망울에는 아직도 그 선임이 존경하는 자리에 서 있는 걸 느꼈어. 섬세하고 예리하다 못해 예민해서 갈구고 또 갈구는, 그러나 그 손길이 없었다면 결코 몸에 익힐 수 없었던 실무 경험 말이야. 그런 회사를 가야 하는 거 아니겠니. 일하면서 빼먹을 게 있는 곳, 혼은 나지만 존경심이 드는 곳, 지치지만 배울 수 있는 곳. 무력감이 아니라 성장통을 느낄 수 있는 곳. 하긴, 그런 회사가 아니라서 귀한 시간 내 가지고 온 면접자에게 그따위 질문이나 던지는 거겠지. ‘한 놈만 걸려라’ 심보로 말이야. 가운데 앉아 가지고 좌장처럼 보이고는 싶었는지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공고에도 없는) 이 일들, 감당할 수 있겠냐”고 묻는 놈 밑에서 뭘 배우겠니. 갈 데 없는 건 똑같은 처지에다, 나이만 열 다섯살 더 많아 이직은 꿈도 꾸지 못할 텐데. 나이 좀 많다고 깝죽대는 게 전부인 놈이 말이야. 잘 됐어. 어차피 됐어도 안 갔을 거잖아. 주제도 모르고 콧대만 높은 것들, 넘치는 노동 인구의 수혜를 받는 한심한

[열여덟, 이런 고3이라 됴아④] 세상을 바꾸는 건, 뜨거운 정의심과 압도적인 문장들이 아냐

잡지를 만든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 네가 만들려던 그 잡지 말이야. 솔직히 말해서 포기하길 잘했어. 원래 잡지를 만든다는 건 혼자서 할 수 있는 업무가 아니야. 유명한 잡지들을 봐. 그 잡지 한 호를 만들기 위해 매달리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니더라. 사진 보정과 편집조차 익숙하지 않은 네가 잡지를 만든다는 건 어쩌면 욕심이 아닐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뭔가를 말하고는 싶은데, 말할 방법이 없어서 편집 디자인에 기대는 너의 부푼 마음 말이야. 나도 그게 뭔지는 알 거 같아.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란 생각이 들어. 잡지를 만드는 일은 단순히 보기에 좋아 보이는 것 정도는 아니야. 어떤 내용을 담아야 하는지를 기획해야 하고, 어떤 제목으로 독자들을 후킹 할 수 있는지, 사진은 또 저렴한 스마트폰이 아닌 미러리스 같은 전문 카메라로 찍어야 하는 고급 기술이야. 글자를 조제(調劑) 하는 일도 그래. 하고 싶은 말을 나열한다고 될 일이 아니라는 거지. 고등학교 1학년 때 기억해? 담임 선생님이 써오라던 독후감, 일부러 단락도 구분하지 않은 채 3000자, 5000자 한 무더기로 써 냈던 거. 마음이 고운 선생님이라서 그랬지, 나였으면 가차 없이 다시 쓰라며 까버렸을 거야. 선생님이 홀로 자리에 앉아 네가 쓴 그 거대한 문장들을 다섯, 여섯 줄로 요약하느라 진땀 뺀 모습도 기억할 거야. 그땐 챗지피티(chatGPT)도 없던 시절인데 말이야. 선생님이 고생 좀 하셨지. 이제 사람들은 손바닥만 한 글을 겨우 읽는 시대에 살고 있어. 손바닥이 뭐니, 손톱만 한 글도 읽지 않는 논 텍스트(non-text) 시대야. 그러나 글과 문장이 필요 없어졌다는 건 아니야. 왜냐하면 인간은 글과 문장으로 의사를 소통하기 때문이야. 글을 읽으려 하지 않는 시대에, 오히려 글을 정제된 손길로 다듬고 또 다듬는 강인함이 필요하다는 걸 나는 말하고 싶어. 네가 듣기에 참 미안한 말이지만, 앞으로도 네가 만들려던 지면신문 오래도록 실패할 거야. 그러나 포기하지는 말아 줘. 그 신문이 너의 멱살을 잡고 삶의 자리를 이끌어갈 테니까. 너의 그 신문에 사람들이 호응하지 않더라도 신문을 만들어 글을 다듬고 다듬는 일에는 지치지 말아 줘. 미래의 내가 과거의 네 글을 보면서 살아갈 힘을 얻을 테니 말이야. 지금의 난 두 학생의 서로 다른 갈림길을 관찰하고 있어. 두 녀석을 보니 네가 떠오르더라. 신념에 가득한 딱딱한 문체, 옳고

[상황설명] 기어코 무르익은 ‘소년의 문장’

연결 기사[열여덟, 이런 고3이라 됴아④] 세상을 바꾸는 건, 뜨거운 정의심과 압도적인 문장들이 아냐[문쏘, 할 말 있어④] 뭘 물어봐야 하는지도 모르는 회사, 영포티에게서 “도망쳐!” 15년 전 소년은 정직한 문장과 꾸밈없는 건조한 문체가 불의에 맞서는 방법이라고 믿었다. ‘단비새’라는 이름의 잡지를 만들려고 애를 쓴 것도 정직함을 지키기 위한 하나의 몸부림이었다. 부도덕한 사회와 협잡한 대중문화라는 프레임은 잡지를 만들려는 열정에 기름을 부었다. 그러나 세상은 무심했다. 세상은 세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어떻게 윤리를 잃어가는지에 대한 방향을 잃고 말았다. 열정을 다해 글을 썼어도 꼼꼼히 읽는 사람은 대학 입시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첨삭하던 담임 교사뿐이었다. 시간이 흐르며 시대는 바뀌었다. 논술을 가르치던 시대는 미디어 리터러시(media literacy)를 먼저 가르쳐야 하는 새로운 국면에 닿은 것이다. 까이는 건 중학생 신문에서뿐만이 아니다. 이름 없는 회사의 면접에서도 까이는 건 마찬가지였다. 한 쪽은 설익어서 까였고, 다른 한쪽은 물러터져 버려서 문제였다. 발신자는 안다. 두 곳 모두 혼은 나지만 존경심이 드는 곳, 지치지만 배울 수 있는 곳, 무력감이 아니라 성장통을 느낄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것을. 정의와 신념에 가득 찬 무리들, 그리고 무력감에 절어 세상만사를 삐딱하게 보는 아저씨를 경험하며 발신자는 15년 전 소년의 실패를 떠올린다. 발신자는 그럼에도 글쓰기를 포기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그 문장들이 이후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재의 발신자를 살리게 될 거라는 분명한 사실을 가리키며 지치지 말라고도 당부한다. 글은 의사를 소통하는 최초의 방식이자 미래의 수신자에게 보내는 최후의 의사소통이다. 15년 전, 소년은 발신에 실패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끊임없이 지치지 않는 발송을

“고통과 맞서야 했던 초기교회”… 완벽한 정답 대신 방향 찾아 헤매야 했다

한 달 만에 완판… 성서의 형성 과정을 다룬 ‘마침내 성경’ 염진호 전도사는 6년 전 이 신문 인터뷰에서 ‘신 죽음의 시대’를 논했다. 서울 압구정에 있는 대형교회에서 일하던 시절이었다. 그는 떠나는 교인들을 보며 좋은 길을 가도록 응원하고 기도하는 사람이었다. 교회에 남은 이들을 바라보던 그의 시선에는 ‘파수꾼’ 이 한 단어가 남아 있었다. 그는 그들을 이렇게 회상했다. “교회 역사와 전통을 사랑하는 이들.” 염진호 전도사침례신학대학교 신학과(B.A.)와 감리교신학대학교 목회신학대학원(M.Div.)을 졸업해 강릉중앙감리교회 간사를 시작으로 청수감리교회, 광림교회 교육전도사를 거쳐 현재는 강릉샘물교회에서 신앙과 삶을 나누고 있다. 그동안 개신교는 달라진 게 없었다.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이 2025년 발표한 ‘한국사회의 다층적 위기’ 인식조사에서 개신교의 신뢰도는 일반 시민의 27%로 나타났다. 이는 개신교 인구로도 나타난다. 2025년 총회 기준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과 합동의 인구는 2015년에 비해 각각 21%(59만8183명), 16%(45만8133명) 감소했다. 10년 만에 100만명이 줄어든 것이다. 염 전도사의 제언은 냉정했다. “우리가 성서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되돌아보는 전환점을 가져야 한다.” 손에는 두 달 전 출판한 책 ‘마침내 성경’이 들려 있었다. ― 무엇을 말하려고 이 책을 썼는가.
Today소랑 2026년 6월 21일 일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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