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달 만에 완판… 성서의 형성 과정을 다룬 ‘마침내 성경’
염진호 전도사는 6년 전 이 신문 인터뷰에서 ‘신 죽음의 시대’를 논했다. 서울 압구정에 있는 대형교회에서 일하던 시절이었다. 그는 떠나는 교인들을 보며 좋은 길을 가도록 응원하고 기도하는 사람이었다. 교회에 남은 이들을 바라보던 그의 시선에는 ‘파수꾼’ 이 한 단어가 남아 있었다. 그는 그들을 이렇게 회상했다. “교회 역사와 전통을 사랑하는 이들.”

염진호 전도사
침례신학대학교 신학과(B.A.)와 감리교신학대학교 목회신학대학원(M.Div.)을 졸업해 강릉중앙감리교회 간사를 시작으로 청수감리교회, 광림교회 교육전도사를 거쳐 현재는 강릉샘물교회에서 신앙과 삶을 나누고 있다.

그동안 개신교는 달라진 게 없었다.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이 2025년 발표한 ‘한국사회의 다층적 위기’ 인식조사에서 개신교의 신뢰도는 일반 시민의 27%로 나타났다. 이는 개신교 인구로도 나타난다. 2025년 총회 기준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과 합동의 인구는 2015년에 비해 각각 21%(59만8183명), 16%(45만8133명) 감소했다. 10년 만에 100만명이 줄어든 것이다. 
염 전도사의 제언은 냉정했다. “우리가 성서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되돌아보는 전환점을 가져야 한다.” 손에는 두 달 전 출판한 책 ‘마침내 성경’이 들려 있었다. 
― 무엇을 말하려고 이 책을 썼는가. 
“간단하다. 성경이 무엇인지 말하고 싶었다. 한국인은 성경을 많이 읽는다. 많이 인용도 한다. 성경으로 권면도 하지만 검처럼 남을 공격하기도 한다. 하지만 성경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성경이 무엇인지 모른 채 그 책을 읽는 데서 안타까움을 느꼈다.” 
― 제목이 무척 직관적이다. ‘구약, 타나크, 신약-마침내 성경’ 성경의 형성사를 담은 의도인가. 
“그렇다. 이미 시중에는 존 바턴이나 리 마틴 맥도날드 같이 훌륭한 신학자들의 책이 많았다. 제목을 특별하게 바꿔보자는 의미에서 이 제목으로 정했다.”
한여름 등장한 은빛 날개 
전도사로선 ‘남다른 출판’ 
염진호의 문제의식 
인용하고 무기로도 쓰고… 
성경을 사랑하는 한국인 
“그러나 어떤 책인진 몰라” 
이렇게 읽어보시라 
무턱대고 차례로 읽기보다 
① 누가·요한복음부터 정독 
② 성서의 중심 예수를 만나 
③ 남은 구약성서까지 일독 
물질에서 윤리로… ‘새 판짜기’ 
한 문장, 맥락, 구절 따서 
왜곡하는 교육은 “노 답” 
예수가 전하려던 메시지는 
주어진 환경과 삶 속에서 
‘실천적인 삶’ 살아가는 것 
고달파도 묵묵히 걷는 삶
성경에 대한 오해, 만들어진 잣대
― “성서는 코란처럼 창조되기보다 천천히 진화됐다”고 표현했다. 이 관점이 성경을 읽는데 왜 중요한가. 
“사람들은 성서가 마치 하늘에서 떨어진 신탁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성경은 그리 인용하라 만들어진 문헌이 아니다. 초대교회로부터 시작해 여러 공동체가 자신의 공동체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문헌이다. 공동체 생활이나 예수를 닮아가는 모습에서 어떤 게 있는지를 보여주는 문헌인데 사람들은 몇몇 구절을 가지고 누군가를 정죄하거나 자기 주장을 강화하는데 성경을 사용한다.” 
― 성서를 내 삶의 가르침, 교훈 아니면 진리를 탐구하는 여정. 이렇게 바라보는 편이 맞지 않나. 
“그게 맞다고 생각한다. 공동체 안에서 바라보는 게 맞다고 보지만 이 또한 시대착오적 발상이다. 지금의 시대는 개인화가 잘 이뤄졌고 공동체성이 약화되고 있지 않나. 몇몇 신학자들은 공동체성이 기독교의 핵심이라고 보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개인으로서의 삶을 영위하고 개인적 삶 안에서 신앙을 찾는 구도자의 모습을 가진 이들이 충분히 많은 시대이기 때문이다. 성서를 하나의 윤리적 가치, 개인의 신앙적 모습, 삶의 방향을 찾는데 도움을 주는 책이라고 본다.”
정답이 아닌 방향이란 관점에서
― ‘윤리는 정답이 아니라 방향’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성경의 정경화 과정 자체가 ‘하나의 윤리적 방향 찾기’였다고 볼 수 있을까. 이단에 맞서기 위한 대안으로 성경이 만들어졌다고 주장한 부분에서 초기 교회 공동체가 찾아가려던 방향은 무엇이었나. 
“정경화 과정에서 교회의 폭력적인 부분은 분명히 있었다. 유대교 입장에서 봤을 때 초대 기독교인들이 가졌던 성경의 해석관(觀)이 자신들의 공동체를 위협한다고 봤기에 타나크를 만들었다. 초대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였다. 70인역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보았는데 이단들이 등장하면서 신약성서라는 문헌을 만든 것이다. 
임박한 종말론에 사로잡힌 이들에게 다른 가르침으로의 이동은 허용될 수 없었다. 그것을 막는 일이 곧 윤리적 책무였다. 정경화라는 방식으로 새로운 기준과 선을 그어주는 게 필요했다. ‘여기 이상 넘어가서는 안 돼’ ‘여기까지가 한계야’라고 그어주는 게 하나의 윤리적 작업이었다고 볼 수 있다. 
역사에서 드러난 폭력적인 부분은 아쉬운 부분이다. 유대교가 나사렛당을 박해했고, 기독교 역시 로마의 권력을 등에 업은 이후 영지주의자들을 박해한 것을 보면 이 방향이 100% 윤리적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들이 처한 상황에서 최선의 방법은 정경화를 통한 윤리적 방향을 찾는 일이었다.” 
― “성경을 도서관처럼 다양한 장르와 층위의 해석이 공존하는 문헌으로 봐야 한다”고 했는데 신자들이 이 관점으로 성경을 읽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구약은 추천하고 싶지 않다. 현대 독자들이 읽기에 충돌이 일어나는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기독교인에게 추천하고 싶은 성경은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이다. 누가복음은 현실의 아픔과 위로,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이들에게 가난하고 위로를 주는 예수를 발견할 수 있는 문헌이다. 요한복음은 다르다. 약간 ‘테토’스럽다고 해야 하나. 예수의 모습이 강인하다. 겟세마네에서 울지도 않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당당히 맞이하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나에게 강력한 정신적인 지지와 지지자가 필요하다면 요한복음을, 나의 연약함과 아픔을 보듬어주는 존재를 찾고 싶다면 누가복음의 예수를 찾아보시라.” 
― 구체적으로 묻는다. 성경에 대해 알고 싶다면 지은이가 쓴 ‘마침내 성경’을 읽은 후 성경을 신약부터 읽고 구약을 읽는 식으로 한번 전체적으로 읽으면 도움이 되나. 
“기본적으로 성서는 어려운 문헌이다. 여러 장르와 여러 해석이 가미된 문헌이다. 내 책은 성경이 복원된 과정을 말하지만, 성서가 가진 진정한 메시지를 찾으려면 우선 성경에 중심이 되는 예수를 먼저 만날 것을 권한다. 그 뒤에 구약의 이야기를 읽으면 편하지 않을까.
한 가지의 예수가 아니라
여러 측면의 존재가 있어
항상 겸손하게 점검해야
갈피를 못 잡는 이들에게
― 오늘날 신자들은 여러 방향 사이에서 어떻게 자신의 윤리적 방향을 찾을 수 있을까. 
“최후의 궁극점은 결국 예수다. 마치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게 방사형 원형이 퍼져나가는 것처럼 성경이 구성되기 때문이다. 여러 층위나 윤리를 가져왔을 때 마지막 핵심의 정상에는 예수가 존재해야 한다. 성서에는 여러 가지 예수의 모습이 담겨 있지만 공동체건 개인이건 상관없이 예수의 모습을 닮아가는 것이 현대 신자들이 가져야 할 윤리적인 방향과 모습이다.” 
― 복음서에도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가장 약한 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 등의 메시지가 있지 않나. 결국 예수를 닮아가는 삶이 신자들의 궁극적 방향이 아닌가. 
“예수가 말하고 싶었던 건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 속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삶으로 살아가는 자세가 아닌가 싶다. 다만 이 예수도 한 가지의 예수가 아니라 여러 측면의 예수가 있다. 인간은 결코 모든 예수, 여러 측면의 예수를 담을 수 없다. 
신학적인 용어로 ‘목격자적 증언’이라고 한다. 네 가지 복음서에서 나타나는 예수의 모습을 합치려는 시도를 보이는데, 나는 목격자적 증언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네 개의 초상화를 하나로 섞으면 피카소의 그림보다 더 기괴한 그림이 나올 수 있지 않겠나. 성경은 네 가지의 예수를 다각도로 제시하고 있기에 네 가지의 예수 중 현재 당신의 윤리적인 상황 속에서 맞는, 닮을 수 있는, 다가갈 수 있는 예수에게 다가가보라고 제시하는 게 복음서가 아닌가 싶다.” 
― 자신이 믿는 예수의 상(像)을 만들어 놓고 성경을 바라보는 시각이 위험할 수 있겠다. 
“굉장히 위험하다. 신성 모독이며 십계명에서 금하는 야훼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모습이기도 하다. 그래서 신자는 항상 겸손해야 한다. 성서를 읽는 독자들은 언제나 내가 생각하는 예수의 모습과 성서가 비치는 예수의 모습이 맞는지, 맞지 않는지를 점검해야 한다. 설령 성서가 말하는 예수의 모습과 내가 믿는 예수의 모습이 일치하더라도 다른 측면의 예수 상이 있다는 걸 인지한 상태에서 나만이 정답이 아니라는 걸 알아야 한다.”
작은 예수로 살아가는 것
그게 기독교인만의 특권
힘들지만 위로가 되기도
다시 성경으로 돌아간다는 말의 의미
― 다시 돌아가서, 이단의 등장이 오히려 성경을 정경으로 만드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말했다. 정통과 이단의 관계에 대한 역설적인 시각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설명해 달라. 
“‘정통이 있고 정통의 가르침을 비틀어서 이단이 생겼다’ 이건 굉장히 현대적인 발상이다. 신약만 보더라도 다양한 분파들이 있었다. 사두개파와 바리새파. 헤롯당도 있었다. 세례 요한과 그의 제자들도 있었고. 사도행전에는 예수를 따르던 나사렛당도 있었다. 유대종교는 각 분파들을 서로 견제하되, 누군가를 보고서 이단이나 악마라고는 하지 않았다. 사도행전에서 베드로가 설교를 하던 때를 생각해보라. 바리새파 어느 누가 로마 경비병 더러 ‘저 이단, 빨리 잡아가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구약의 완전한 폐기를 주장한 마르키온과 같은 극단주의자들이 생겼으므로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정경화를 진행한 것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성경에 대한 가르침이 점점 왜곡되거나 교리 중심으로 한 문장, 한 맥락, 한 구절을 따 다보니 몰몬교나 여호와의증인, 통일교, 신천지 같은 이단들이 등장한 게 아닌가.” 
― 이 역사적인 사실들이 오늘날 교회가 이단을 대하는 태도에 어떤 시사를 준다고 보나. 
“우리가 성경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되돌아보는 전환점을 가져야 한다고 본다. 시중에 나온 성경공부 교재들을 보라. 다 교리 중심이고 말씀 한 구절 두 구절 받아 적는 정도다. 문맥을 생각하지 않도록 공부시킨다. 한국교회, 현대 교회가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성경의 전체적인 콘텍스트(문맥) 안에서 어떻게 적혔는지, 어떤 메시지를 던지는 지를 알게 해주는 게 중요하다. 기복신앙이나 특별 치유 같은 신적 계시는 예수가 원한 가르침이 아니라는 걸 아는 게 필요하다. 예수와 성경이 원하는 건 자신의 삶을 닮아가는 모습이라던 존 바턴의 이야기처럼 예수의 모습을 닮아가는 방식으로 공부하는 게 중요하다고 본다. 성경은 뭔가 비밀스러운 계시나 코드를 말하는 게 아니라 예수의 삶과 닮아가는 자세를 말하며 닮아가기 위해 이야기하는 믿음의 공동체의 과정을 알려주는 책이다.”

그럼에도 구주(救主) 예수를 따르는 이유
― 더 실천적인 삶, 그 얘기는 비틀어서 보자면 고달프지만 견디면서 성실하게 살아야 하는 삶 자체를 말하는 것 아닌가.
“그렇다.” 
― 아, 기독교 신앙. 참 힘들다. 
“굉장히 힘들다. 그럼에도 동시에 위로가 되는 종교이기도 하다. 어차피 우리 인생은 성경을 믿든 안 믿든 고통 가운데 있다. 다른 종교나 카르페디엠과는 달리 다른 답을 제시하고 있다. ‘네가 힘들지만 너를 위로하는 예수가 존재하고 그 존재를 통해 힘을 얻고, 이제 너도 누군가에게 필요한 예수가 되어서 하나님이 원하는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가 보자’고 제시한다. 그저 종교생활이 아니라 내 삶을 통해 주변을 하나님의 나라로, 내가 예수로 살아가는 것, 누군가를 또 다른 예수로 변화시키는 데 도움을 주는 것. 그게 기독교가 이 고통 중인 삶 속에 행복을 주는 방법이라고 본다. 그게 기독교만이 주는 특별한 위로라고 본다. 예수와 동행하는 삶의 여정. 기독교인만의 특권.” 
염 전도사는 이 신문에조차 말할 수 없는 고통의 시기를 겪고 있었다. 
“‘마침내 성경’은 내게 은빛 날개가 있다는 걸 깨닫게 해준 책이었다. ‘이제 나는 더 이상 날 수 없어’ ‘나는 더 이상 할 수 없어’라고 생각하던 중, 책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나도 날 수 있는 날개가 있다’는 걸 깨닫게 해줬다.”

차마 아프신 어머니 저버릴 수 없어 참고 견딘 삶… “성경은 역전의 드라마”
염진호 전도사가 책을 세상에 공개하면서 페이스북에 올린 글이 화제였다. “그렇지만 내 환경을 원망할 시간에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고….”(2025.08.28) 와신상담(臥薪嘗膽)이 떠올랐다. 
“‘마침내 성경’이 준 의미는 내가 믿고 내가 바르다고 생각하면서 걸어온 길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증명해준 증명서 같은 책이다. 
아프신 어머니를 저버리고 서울로 떠나거나, 내 욕심을 챙기는 삶은 예수의 가르침과는 맞지 않았다. 그저 강릉에서 묵묵히 나의 때를 기다리며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그 최선이 어느 순간 좋은 인맥으로 이어졌고 ‘마침내 성경’이라는 좋은 책을 만들 수 있었다. 
현실적인 사람들의 눈으로 봤을 땐 ‘이건 답이 없어’ ‘기독교의 탈출은 지능 순이야’ ‘신학을 탈출해야 해’라고들 말한다. 하지만 성경은 언제나 그것을 역전하는 드라마가 아니었나. 역전의 드라마 길 끝에서 꿋꿋하게 걷다보면 와신상담이란 사자성어처럼 제2, 제3의 ‘마침내 성경’을 만들 수 있으리라 본다.” 
― 떠나는 교인들을 보며 어떤 생각이 들었나. 
“‘안타깝다.’ ‘아, 이분들이 조금만 더 좋은 교회를 만났다면’ 이런 생각들이 내 마음을 지배한다. 교회를 떠날 즈음, 교회 안의 사람들이 떠나려는 이에게 등 돌린 것을 보면서 굉장히 안타까웠다. 
그러나 교회를 떠난 이들에게 드릴 수 있는 말씀은 이것이다. 공동체가 아니어도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분명히 성서에 나오는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실 것이라는 믿음. 어떻게 보면 모세도 공동체를 떠났지만 수장이 되지 않았나. 그럼에도 교회를 떠난 이들을 보며 한국교회가 잘못했다고 생각한다. 좋은 교회라면 대신 사과할 수 있어야 한다.” 
― 성경이 필요 없는 시대에 왜 우린 ‘마침내 성경’과 성경을 읽어야 하나. 
“기독교와 대화하기 위한 첫 걸음이기 때문이다. 신이 눈에 보이는가. 현재에도 예수가 존재 하는가.  기독교가 대화할 수 있는 매개체는 성경뿐이다. 그럼 성경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무슨 책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마침내 성경’은 대화의 장으로 이끌어가는 첫 번째 초대장일 뿐이다. 이 책을 통해 성경을 한 번 읽어보길 바란다. 
― 성경공부나 교회 소그룹을 통해 이 책을 읽는다면 어떤 방식으로 공부하면 되나. 
“이 책을 소그룹이나 성경공부용으로 만들지는 않았다. 그럼 어떻게 읽어야 하느냐. 개인적으로 읽기를 권하고 싶다. 그게 어렵다면 신학 전공자와 독서 모임 방식으로 읽으면 좋다. 이 책은 그리 어렵지 않다. 신학 전공자아라면 두 번, 세 번만 독파하면 충분히 읽힐 수 있게 만들었다. 다만 소그룹적 제안이 있다면 이 책을 읽기 전과 읽은 후의 복음서를 대하는 달라진 태도를 서로 나눠보면 좋겠다.” 
― 교회 안에서 신앙의 회의를 겪는 이들에게는 이 책으로 무엇을 얻을 수 있나. 
“성경은 단순하게 신적인 영감으로 한 번에 만들어진 일필휘지 문헌이 아니다. 그 안에는 모순도 존재하고 모순을 받아들이면서 그 모순을 해결하려던 해석학적 시도도 담겨 있다. 그 문헌 안에서 우리들의 교훈과 타산지석의 실패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의 최종 목표는 작은 예수로 살아가는 삶이 아닌가. 이 책을 통해 성경을 읽어보고 나서 교회를 떠날지 말지, 고민해도 늦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 ‘마침내 성경’을 읽기 전과 읽은 후에 독자들이 어떻게 달라지기를 바라는가. 
“듣고 싶은 말은 이거다. ‘성경을 읽는 게 재밌어졌어요.’ ‘우리 성경 읽어봐요.’ ‘성경공부 시작해 봐요.’ 이 책을 읽고 성경을 읽어보길 바란다. 분명 성경을 바라보는 당신의 눈이 달라질 것이다. 당신이 스스로 성서를 읽을 수 있을 때까지, 달려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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