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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자유의새노래 칼럼

미소 짓는 폭력

입력 : 2021. 02. 11  07:30 | 디지털판

 

 

 

 

슬픔은 직관적이지 않아서 슬프다. 누군가의 죽음이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음’에서 찾아오는 게 아니라 완벽히 비어‘있음’을 느낄 때에야 비로소 슬픔으로 다가오듯. 직관이란 단어에서 느끼는 것처럼 아직도 여고생 세 글자에서 냄새나는 직관의 향기를 누리고 싶었다. 학생이라는 이유로 용서받고 괜찮다는 위안을 들으며 금세 일어나 달려갈 수 있다는 희망. 아직도 젊다고 어리다는 이유로 모든 것이 통용(通用)되듯 여고생 단어에서 느껴지는 직관적 이미지 말이다. 그러나 나이를 먹으며 세상은 직관에 의해서만 이해되지 않는단 슬픈 사실을 조금씩 마주한다.

 

젊음이라는 이유만으로 착취당하는 개인에겐 너무도 나약한 사회적 구조가 그렇다.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된 김용균의 죽음은 그의 죽음만을 가리키지 않았고, 그 뒤에 신문 1면을 뒤덮어 퇴근조차 하지 못한 노동자의 어두운 이름들을 가리킨다. 후배 기자를 생각하며 피켓 든 조선일보 사옥 앞 성한표 해직기자 메시지는 100년 역사를 뒤로하고 유신에 일방 옹호하던 또 다른 직관적이지 않은 부끄러운 권력을 가리킨다. 하지만 어떠한 사회적 사건보다도 직관적이지 않아서 내 마음을 찢어발긴 슬픔을 미소 짓던 친구의 얼굴에서 발견했다.

 

우리는 타자에게 향한 미소를 긍정으로 절대 해석한다. 첫 모습, 3초의 분위기가 그렇다. 미소는 긴장을 이완하고 풀어헤치고 갑옷을 해제하게 만드는 힘을 가진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자본주의라는 단어가 붙으며 미소의 의미는 바뀌었다. 돈을 입금해 웃게 만드는 모종의 거래에 대한 결과 따위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비즈니스 관계에서 미소는 큰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인간관계에서 누가 더 미소를 이용한 스킬을 활용하느냐에 초점을 맞춘다. 미소에 대한 소외(疏外)는 직관적이지 않음에서 다가온다. 모든 것이 정치적이다. 타인 귀에 기울이는 광장, 한나 아렌트의 이소노미아(isonomia)를 비웃듯 미소는 권력을 상징하는 또 다른 언어로 등장해 타자의 얼굴에서 직관적이지 않은 기술로 드러난다.

 

인간 내면이 정돈되지 않았다는 말과는 차원이 다르다. 아예 정돈할 것 하나 없다는 분위기를 내면서 아무 일도 없다며 미소하나 짓고 만다. 커튼 하나 가리면 그 뒤에서 무슨 짓을 하고 있을지 불쾌감을 만들어 낸다. 자신의 속마음은 철저히 가린 채, 약점 잡히면 큰일이라고 생각하는 건지 친구가 아니라 서로의 경쟁자라고 생각하는 건지. 민낯이 아니라, 감추고 있는 여고생의 거짓된 민낯을 본 자만이 미소 짓는 슬픈 얼굴을 알아차릴 것이다. 그 웃는 얼굴의 틈에서 슬픔을 발견했다. 금으로 갈라진 네 얼굴의 균열 속 미소에는 직관적인 말로써 표현할 “이렇게 살고 싶지는 않아”라는 음성 언어가 귀에서 들려온다. 보이지 않았던 미소라는 직관 속에 숨은 ‘이렇게 살고 싶지는 않아’라는 고통의 비명을. 웃으며 비명을 지르는 기괴한 광경들.

 

레비나스는 근대 서구인이 가졌던 사고방식을 비판한다. 타자는 지배할 수 있는 영역을 넘어서고, 세상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동일자로 동일화해 분절시키고 배열할 수 있다는 믿음을 무너뜨렸다. 오늘 너의 미소는 나를 너의 편으로 만들기 위한 기브 앤 테이크에 불과할 뿐이다. 우리는 세상을 내 편으로 만들 수 없다는 사실을 이미 전체주의라는 비극 속에서 교훈으로 얻었다. “살아남아야 한다” “좋은 학교에 가야만 한다”는 입시 지옥 속에 자신을 밀어 넣으며 모든 관계를 비즈니스로 만들어 스스로 공허한 존재로 소외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아야 할 텐데. 그러니 내 앞에서 만큼은. 어두웠던 숨겨둔 마음의 커튼을 열어젖히고, 환하게 웃으라고. 있는 그대로의 얼굴로. 직관적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