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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질일기

[아르키메데스의 점] “진리를 바라본다”의 의미

입력 : 2020. 11. 18 | C7

 

 

모든 서사와 이야기가 붕괴된 시간에 토대를 묻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내가 선 이 자리가 단단한지, 튼튼한지를 넘어 이 토대가 옳은 위치에 서 있는지. 이 토대의 이름은 무엇인지. 언제 만들어졌고 무엇에 의해 세워졌는지 묻는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 완전한 서사와 튼튼한 토대란 존재하지 않는다. 물보라와 함께 휩쓸리면 사라질 모래성과 같다. 니힐리즘(nihilism)은 공포가 아니라 권태(倦怠)이며 내러티브 붕괴 이후에 발생하는 극단적 공허감이듯 공포 시대가 막을 내리며 불안한 물보라가 흩어지는 파도처럼 현대인의 가슴을 적시기 시작했고 이미 젖고 말았다. 예고 없이 내리는 소나기 먹구름에 겁을 먹은 아이처럼(여자친구, RAINBOW, 2017).


◇깨진 유리조각처럼 기억들이 박살나며 발생한 기억단절
그동안 거대 서사로 서 있던 상징적 서사인 탈이집트내러티브는 인간을 죄인으로 상정하고 신의 구원을 통해 이 세상을 벗어나는 해방, 탈출을 목표로 설정했다. 현대에도 탈이집트내러티브가 유효한 근거는 자기 착취 시대를 살아가는 수많은 현대인 중에서도 여전히 억압 시대를 살아가며 해방을 꿈꾸기 때문이다(유아, 숲의 아이, 2020). 한병철의 텍스트가 소비되기보다 강제된 노동으로부터의 탈출, 억압된 집단으로부터의 해방이 주류였다.


유감스럽게도 거대 서사인 탈이집트내러티브에서 하나 둘 탈출함으로써 철학자의 지적처럼 노동조차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의 자기 착취로 이어지며 자기 기만적 환경을 구축하는 시대에 발 딛고 말았다. 이제 더는 힐링이 조류가 아니다. 번아웃은 일상이 되었고 쉼을 요구하는 존재와 노동하는 존재의 분리는 스스로의 정체성에 혼란을 줄 만큼 나뉘고 말았다. 쉬고 싶을 때까지 쉬었던 과거의 시간과 끊임없이 자신을 착취해야 하는. 이른바 많은 것을 알게 된 오늘의 시간은 시대를 실마리로 엮어 통사(通史)로 보게끔 하지 않으며 작은 단위로 분절된 단위로 과거사를 인식하게 만들었다.


분절된 단위의 과거 조각들은 더는 기억되지 않는 일상들 속에서 유리조각처럼 깨어졌고(프로미스나인, 유리구두, 2017) 다시금 붙이기엔 불가능에 가까운 수준에 이르렀다. ‘기억단절’은 여기에서 비롯한다.


◇서론: 대안이 없으므로 자화상의 해석이 전부라는 말을 밝힌다
자본주의를 해체하거나 혁명으로 뒤엎는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이미 그 길을 걷고 있으며 인식한 순간 도래한 세계이자 시대였기 때문이다. 돌아갈 길도 막혀 있다. “잘자요”(러블리즈, 걱정인형, 2020)를 부른다 한들 사라진 낭만의 첫눈(첫눈, 2017) 끝에 죽음에 다다른 공허감은 이미 많은 것을 알았다는 슬픔과 함께 잠식되고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시대로의 레트로토피아를 꿈꾸게 만든다. 따라서 꿈은 미래를 바라보는 디지털 동영상이 아니라 과거로 회귀하려는 특성을 가진 자화상이 되고 만다. 멋들어진 수천의 좋아요에 매몰될 자화상은 움직이지 않으며, 끊임없이 과거만을 응시한다. 파울 클레의 「새로운 천사」가 발터 벤야민에 의해 해석되기 전까지 과거에 머무른 것처럼.


소녀가 자신의 세계에서 타자로의 세계에 가 닿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풍선을 날린 것처럼(WoW!, 2017) 그렇게 해석한 것처럼 이미 이미지로 박제된 존재는 해석 이외의 움직임을 내 보일 수는 없다. 이처럼 현대 사회에 등장한 내러티브 붕괴와 니힐리즘, 지금을 살아가는 각자도생 현대인에게 이렇다 할 대안과 방법을 제시할 수는 없다. 이 신문에 실리는 기록은 단지 자화상처럼 박제된 이미지를 해석할 따름이며 단지 오늘의 존재가 어제의 공간을 바라보며 재해석할 뿐이란 점을 미리 밝힌다. 모든 대안으로 언급된 새로운 방법론들은 인스턴트 해결책이란 점에서 끊임없이 대안을 고민해야 함을 정하여둔다.


◇탈이집트내러티브 붕괴, 공허한 공간
줄곧 탈이집트내러티브는 인간을 획일화된 존재로 생각해왔다. ‘죄인’과 ‘죄인 아님’은 ‘유대인’과 ‘유대인 아님’의 차원 너머 보편적 인간으로 확장했고 반드시 믿어야 할 전제로 성장했다. 천국과 지옥은 완성된 내러티브의 결과이자 죽을 때까지 실현해야 할 가치로 교리를 통하여 내세웠다. 그러나 ‘죄인’과 ‘죄인 아님’이 붕괴된 지점인 새로운 내러티브 등장은 현대 사회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이해된다. 드라마와 뮤지컬 속 캐릭터는 평면적 존재일 뿐 아니라 다층적인 층위들이 얽히고설켜 주인공으로 집약된다. 모든 사람들은 주인공임과 동시에 조연이기도 하다. 존재의 시각에 따라 달리하는 캐릭터성은 죄인이란 단어를 해체했고 더는 인간은 죄인이 아닐 수 있음을 내보였다.


따라서 구약 곳곳에 등장하는 스올(창세42,38; 신명32,22; 1열왕2,6; 욥기11,8; 이사14,15; 요나2,2)의 다양한 용법은 반드시 가지 말아야 할 곳을 넘어, 죽으면 가는 곳, 내 아들 보러 가고 싶은 장소로도 사용되면서 지옥 개념이 무너지게 된다. 이제 지옥은 가지 말아야 할 곳이 아니다. 지옥을 넘어 천국을 오가며 현대라는 시간성 속에서 캐릭터는 이 세계를 구할 수 있는 히어로로 등장하는 시대로 발전한 것이다. 문제는 토대다. 교회가 해석한 성서라는 토대 속에서 삶을 향유하던 사람들이 더는 탈이집트내러티브를 소비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했고 ‘토대가 무너졌다’고 예단하게 되었다.


예수를 배반한 제자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부활한 그리스도를 만나자 혼란했던 회환이 느껴지듯 존재의 부재에서 경험하는 공허감이 토대 자체가 없다는 니힐리즘에서 비롯했다. 모든 것이 얼어붙고 차가워진 배경 속에서 캐릭터는 죽음의 심연이란 공포와 불안을 느끼며 녹여 달라(이달의소녀, frozen, 2018)는 요청만이 남았다. 현실에는 예수가 제자를 찾아갔던 것과 달리 진리가 우리를 찾아올 수 없기 때문이다. 진리는 저 멀리 존재한다. 태양보다 더 멀다. 태양은 결코 우리의 세계로 달려올 수 없다.


◇아장스망의 역설: 현재의 공간에서 과거의 사건들을 다시 보는 일
성서가 문학으로 전락하고 진리의 자리에서 내려오자 이렇게 물었다. 진리는 없는가? 알 수 없는가? 저 멀리 있다면 바라는 볼 수 있지 않은가? 그러나 복음서는 이미 그 빛이 존재하지만, 세상은 그를 알아보지 못한다고 지적한다(요한1,10). 빛이라고 생각했던 존재는 오히려 빛이 아니었고, 사람들은 사막여우의 말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가장 중요한 것, 이 기본적인 진실을 잘 잊고 말았다. 따라서 청년 예수는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 인간의 손으로 진리를 죽인 것이다.


그러나 복음서의 선언처럼 진리(말씀)는 늘 하느님과 함께 했다. 모세의 율법을 통하여 ‘죄인’과 ‘죄인 아님’을 깨닫는 것처럼(로마7,7) 진리는 은혜를 생겨나게 했다. 사막여우의 말처럼 잠시간 잊고 있었던 기억단절은 과거사를 분절로 기억함으로써 잊어버리는 역설을 의미한다고 밝힌 바 있다. 실처럼 꿰어야 하는데, 꿰는 작업을 내러티브로 만든다고 설명할 때 그리스도의 부활이 의미하는 바를 알 수 있다. 예수의 죽음은 충격적 사건이다. 제자들이 뿔뿔이 흩어지며 예수가 제시한 새 내러티브를 이해하지 못했고, 예수의 죽음과 함께 진리는 잠시간 은폐되었다. 잠시 감춰진 것 같으나 부활이라는 내러티브를 통하여 그리스도가 다시 살아나고, 산몸으로 제자들에게 찾아간 것처럼, 잠시 은폐된 것이다.


예수가 제자들을 찾아가 부활이라는 새로운 내러티브를 제시하며 성서를 풀이하자 제자들은 비로소 진리의 존재를 깨닫고 마음의 뜨거움을 느꼈다(누가24,32). 은폐 속에서 등장하는 공허감과 존재의 부재는 다시금 과거의 공간인 성서를 통하여 진리에 자리를 내줄 수 있음을 보인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방법을 통해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현재의 시간 속에서 분절화 된 과거의 사건들을 재해석함으로써 새로운 실로 꿰맨다면. 분명히 미래라는 새로운 공간을 되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아장스망의 역설이다.


◇일시적 결론: 진리를 바라본다
복음서는 진리를 빛으로 비유했다. 그 빛은 곧 진리이며 미래에 존재하는 희망이기도 하다. 그 존재는 승천하고 다시 재림할 것이다. 기독교적 내러티브의 강점은 과거의 공간을 재해석함으로써 구약에서 신약으로, 신약에서 현대 교회로 교리와 성사로써 확장시켰다. 하느님은 사랑이라는 전제 속에서 이웃을 사랑하고 구원을 이루어가는 방식이 ‘유지하기’가 아닌 ‘함께 살아가기’로 발전한 덕분이다. 따라서 성서는 더 이상 과거의 공간이 아닌 셈이다.


그 희망을 신 죽음의 시대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곧 찾아오는 여명을 봄으로써 그 진리가 도래하고 있음을 보인다. 따라서 고통 중에 있을 때라도 그 시간이 길더라도 반드시 새벽 너머 아침은 찾아온다. 지금의 새벽 너머 아침, 진리를 향해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진리는 어느 날 반드시 일정한 시간에 찾아오는 아침이자 희망이고 미래다. 토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토대는 언제든 흔들리며 무너질 수 있다. 그러나 분절된 과거가 서로 유기되어 하나의 실처럼 꿴 것처럼. 캐릭터들이 손잡아 무너져가는 토대 위에 힘겹게 서 있을지라도 아직 무너지지 않은 살아남은 토대 위에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남아 있는다.


더는 8인조 여자 아이돌 러블리즈 시대가, 토대와 함께 무너져 사라진다 해도. 여덟 명, 수천 명의 연결된 존재들과 살아간다면 이제 러블리즈라는 과거의 존재는 중요하지 않게 된다. 이미 연대를 통하여 다가오는 그 빛을 바라보고 있다. 그 진리가 우리 앞에 서 있고, 점차 다가오고 있다. 가장 어두울 때 곧 밝아오는 여명을 의미한다. 부활이 가까이 왔을 때 제자들은 낙담에 빠져 있었다. 오순절이란 새로운 내러티브가 등장하기 전까지 버텨야 한다. 살아야 한다. 그렇게 방파제 앞에서 그 진리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