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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여기는, 에트

냉소와 비관이 어리석은 너보다 나을 거라는 착각 입력 : 2020. 12. 17 | 디지털판 악은 친근한 얼굴을 내밀며 다가온다. 뿌리치지 못하게 만드는 모종의 미소는 쉬운 언어로 정의하지 못하게 만든다. 그런 악은 알지 못하는 시간에 갑자기 찾아온다. 정해진 시간도, 정해 놓을 새도 없이 다가와 판별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를 때까지 곁에서 견뎌낸다. 살아남은 악이 악으로 보이지 않는 단계에 이르면 악은 악이 아니게 된다. 친구의 형상을 빼닮은 괴물 악은 종국에 파멸을 낳도록 사주한다. 사주하기까지 긴 시간이 걸리기도 하고, 짧은 시간 안에 이루어지기도 하듯이 시간은 중요하지 않음을 말해준다. 중요한 한 가지. 정해지지 않은 시간 속 모종의 미소로 다가오는 동안에 발견한 이 악을 뿌리칠 수 있는지의 용기다. 용기를 가지고 있는다면 악은 더 이상 친구의 .. 더보기
고마워 입력 : 2020. 11. 02 | 디지털판 받은 메시지에 희미하게 적힌 사진 속 이름을 하염없이 보았다. 화면에서 반짝이던 텍스트는 뒤로 가기와 함께 사라졌지만 뇌리에선 지워지지 않았다. 그리고 허공에서 떠오른 그 이름을 불렀다. 더는 그 이름은 응답하지 못하지만 그 이름을 불렀다. 응답이 없었다. 길 위에 보이는 걸어가야 할 남은 길에 집중하기 어려워 잠시간 뒤를 돌아보았다. 또 메시지가 왔다. 도대체 무엇을 한 것일까, 답장을 보내도 수신 받지 못하는 메시지를 하염없이 읽으며 멈춰 섰다. 탁한 공기처럼 자세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상처와 아픔이 그러져 있었다. 기가 막힌다는 내용의 제목과 함께 온 다음의 메시지엔 분노와 절망이 담겨져 있었다. 사진과 텍스트엔 익숙한 등장인물과 간략한 시놉시스가 포함되.. 더보기
존재불안 입력 : 2020. 08. 21 | 디지털판 도서관을 나오고 오랜만에 만난 집사님의 표정은 여전히 밝은 미소 그 자체였다. 사람을 꽃으로 비유해도 가장 어울릴 만한 미소 뒤에 숨은 진리를 알고 싶던 갈망이 여전히 언어로 드러나는 모습도 여전했다. 잘 지내냐는 물음 뒤에 숨은 “진리를 알고 싶으세요?”라는 질문에 먼 길을 열차타고 주일 예배를 드리면서 지내고 있다는 “그래, 정말 정말 알고 싶어”라는 답변은 3년 전과 동일했다. 존재 불안은 늘 파도처럼 알 수 없는 시간에 우리를 향해 돌진한다. 모든 것을 파괴하는 강력한 힘, 저항하기 어려운 도무지 받들기 곤란한 힘으로 밀고 들어온다. 존재 불안 그 자체를 잊기 위해 중독된 삶을 살아가지만. 근본적으로 허무한 인간의 본질을 깨닫고 죽음을 선택하는 경우도 .. 더보기
빗방울1 입력 : 2020. 08. 15 | 디지털판 갑자기 쏟아지는 빗소리에 잠에서 깨보니 어제와 달라진 시원한 분위기를 느꼈다. 창밖을 내다보았다. 비가 쏟아졌다. 시원하게 부는 빗소리에 바람도 세찼다. 손을 뻗어 느껴지는 찬 빗물을 만져봤다. 촉촉하다 못해 팔꿈치까지 내려오던 빗방울에 비로소 정신이 들었다. 뜨거운 바람 보다야 내리는 빗방울이 고마웠다. 그야 적당히만 온다면 모두에게 즐거운 비 소식이겠지만. 알 수 없는 시간에 도달하자 흩뿌리는 빗방울처럼 내 인생도 예측 불허다. 중년 백수 아줌니도 그랬다. 구체적인 계획이 있었어도 내 뜻대로 이뤄진 게 한 가지도 없었다고. 누군가는 인생의 계획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꿈을 가져야 한다는 맥락에서 말이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는 말도 .. 더보기
그 밤들 속에 슬퍼하는 이에게 입력 : 2020. 07. 03 | 수정 : 2020. 07. 03 | 디지털판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에 니고데모를 떠올린 배경은 꽤나 복잡했다. 요한복음서에 등장하는 니고데모는 다른 공관복음서엔 찾을 수 없는 독특한 위치의 캐릭터다. 그렇게 8장에서 18장까지, 열 장을 거쳐 등장하지 않던 그가 등장한 배경은 이제 막 예수의 시신이 십자가에 내려오던 금요일 오후였다. 예수와 가깝게 지내온 니고데모가 찾아온 그 날 밤도, 그 밤들 중 하나였고 어쩌면 밤하늘과 함께 예수의 제자들 사이에 가려진 인물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밤하늘과 함께 그의 얼굴이 가려졌다. 니고데모의 얼굴도, 사랑하던 제자의 온기도, 베드로의 낯빛도, 유다의 그늘도. 예수는 자신의 제자에게 저주를 받던 그 밤들을 기억할 것이다. 그렇게 우리.. 더보기
역사로 해석하고픈 욕망 입력 : 2020. 06. 22 | 수정 : 2020. 06. 22 | 디지털판 누구든 자신의 삶이 거창해 보이고, 멋있어 보이고 싶은 욕망을 가진다. 세상은 원대해 보이고 원대해 보이는 세상의 꼭대기 위에서 군림하고 싶었던 꿈들이 존재한다. 나는 커서 대통령이 될 거라는 허망한 꿈도, 유명한 유튜버, 세계적인 아이돌이 되고픈 열망도. 서울대와 하버드, 지금도 나열하기 어려운 세계적인 소원들이 오늘의 부끄러운 욕망으로 느껴지던 이유에는 현실성도 진지함도, 가능성도 없는 철없던 어린 시절의 꿈들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위대한 철학자를 순위로 매기는 무가치를 떠나서 철없던 어린 시절의 꿈들이 허망한 이유는 세계가 현실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세상은 순위로 매겨서 해결되는 문제들은 없으며 셀럽들이 우리의 심각한 .. 더보기
유부 선생님의 따귀 입력 : 2020. 05. 15 | 디지털판 선생님 옆을 보좌하며 출석부든 내 모습은 누가 봐도 비서처럼 보였을 것이다. 비서답게 6년이란 시간 속에서 두 번. 두 번 선생님 입에서 나오던 한 숨을 들어봤다. 하루는 무더운 여름 애써 수업 중에 선생님이 격노하던 때였다. 얼마나 시끄럽던지 스스로가 자제하질 못할 수준으로 노이즈가 번지자 아이들을 향해서 끝내 윽박지르고 말았다. 선생님은 장정 한 시간 동안 설교를 이어갔고 다른 수업에도 자제하질 못하면 되겠느냐 혼냈다. 사실 아이들도 짓궂었다. 자기들 싫어하는 선생, 수업시간에 대답하지 말아보자 단합했지만 나 같은 반항심 있는 놈 때문에 무산되곤 했으니 말이다. 한 번은 연로한 담임에게 대들다 따귀 맞은 광경을 목도도 해봤다. 대놓고 교육청에 신고하겠다고 .. 더보기
“착한 사진은 버려라” 입력 : 2020. 05. 01 | 디지털판 두 사진의 차이를 물으면 케이크와 꽃.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그렇다. 고등학교 3학년 마지막 학년을 지내며 담임선생님 생일을 맞아 찍었다. 아홉 시간이 지나 카메라에 담은 꽃 사진이 케이크를 찍은 사진보다 더 의미 있다고 느꼈다. 예쁘기 때문이다. 생각 없이 담아 놓은 케이크 사진보다 의미와 포커스를 두고 찍은 꽃과 하늘, 나비 사진이 더 기억에 남으리라 생각했지만. 여러 해가 지나 생각은 생각에 지나고 말았다. 동창과 함께 다시 본 그 시절 사진은 분명히 포커스도 맞지 않고, 흔들림도 보정하지 않아 상업용으로 남길 가치도 없는 사진이라 생각했지만. 우리라면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그 때의 감정이 사진 그 자체에 오롯이 남았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당장 유.. 더보기
그것을 만나는 시간에 입력 : 2020. 03. 19 | 디지털판 익숙하게 느껴지지 않았던 이유는 그것을 인식할 때마다 늘 그것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늘 어둠 속에서 자신이 살아있음을 말해주었고 색채를 잃은 것 같으나 잃지 않은 특정한 색깔로 다가올 때 자신의 존재를 드러냈다. 그것을 불편함이 창궐하는 자리에서 만났다. 그것 속에 존재할 때 흥미로움을 깨닫는다. 그것 속에는 짜릿함이 없다. 그것 속에는 소음이 없다. 그것 속에는 뜨거움도 없다. 그것 속에는 박수 소리도 없고. 그것에는 동질감이 없다. 그것에는 강박도 없으며. 그것에는 행위도 없다. 때로 그것은 타자이기도 하고, 그것은 침묵이기도 하고. 그것은 대화이기도 하고. 그것은 슬픔이기도 하다. 그것과 만남을 가질 때 비로소 인간으로 살.. 더보기
봄의 햇살이 그리워 미치겠다 입력 : 2020. 03. 14 | 디지털판 토요일 아침 9시, 머잖아 개방한 도서관 끄트머리 자리에 앉아 대판으로 만들어진 신문을 펴고 한 글자 한 글자 읽어내려 가다보면 한 시간 반. Books엔 어떤 기사가 실려 있을지, 사진 한 번 훑고 거대한 제목에 끌리는 기사부터 정독했다. 드립 커피도 있다지만 꼭 300원 짜리 자판기 커피를 마셔왔다. 그게 룰이고, 10년 간 이어온 습관이다. 유일하게 10년의 시간이 단절된 한 차례의 2년을 제외하곤 그 습관이 단 한 번도 끊어진 적 없었다. 전염병이 평범하고 행복한 나의 일상을 빼앗아 갈 줄은 꿈에도 몰랐고 정리를 위해 열어둔 파일 속 햇살에 비친 어제의 신문을 보노라니 그 일상이 몹시도 그리웠다. 언제면 일상으로 돌아갈까, 언제쯤 그곳으로 돌아갈까. 언.. 더보기
“나는 괜찮지 않다” 입력 : 2020. 02. 07 | 디지털판 집단으로 모여야 한다는 강박은 두려움을 잊게 한다. 마음속 무자비하게 만들어지는 두려움을 조금이라도 잊고자 집단으로 모여든다. 나와 동일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를 묻고, 공감할 감정을 가졌는지 묻고, 다시금 재확인한다. ‘나는 괜찮다’를 느끼는 순간이다. 그런 같은 성(性) 테두리 안에서 이질감을 느낀 이유도, 종교라는 테두리 안에서 불쾌감을 느낀 이유도, 좌파와 우파라는 테두리 안에서 지루함을 느낀 이유도 한 번도 집단은 나의 괜찮음을 묻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테두리를 벗어나는 순간부터 언제든지 사람들의 비웃음이 될 것임을 상기하며 살아왔다. 지금도 종교라는 테두리를 벗어난 것을 부끄럽게 생각지 않는다. 사나이로 살지 않아도 불편한 것 하나 없이 지낸다.. 더보기
만들어진 것에 우리는 주목한다 입력 : 2020. 01. 20 | 수정 : 2020. 01. 20 | 디지털판 미아쟈키 하야오(宮崎駿)는 『미래소년 코난』에서 만들어진 것에 주목한다. 몬스키란 여성이 악마가 되어가는 과정에서, 다시금 인간의 순연함을 되찾는 과정을 그린 19화에서 만들어진 것의 실체를 깨달은 몬스키의 충격을 그려낸다. 하야오가 담아놓은 인간의 조건엔 아무래도 순연함이 존재하지 않을까. 순연함은 진정성과 궤를 달리 한다. 진정성도 만들어진 것에서 비롯할 수 있기에 만들어지지 않은, 존재 그 자체의 것을 순연함이라 말할 수 있다. ‘만들어진 이념’ ‘만들어진 기억’ ‘만들어진 계급’ 하야오가 지적한 2008년을 훌쩍 넘은 지금에 이르기까지 인류는 멸망하지 않았다. 다만 여전히 우리는 기억 전쟁으로 만들어진 것을 위해 살아.. 더보기